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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대선을 준비하는 정치인들은 민생행보에 속도를 내며 다른 시대를 약속하고 있다. 이 행보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공간이 있으니 바로 장애인, 노인 등의 사회복지시설이다. 지난주 대선 불출마를 선언한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도 1월14일 충북 음성 사회복지시설 꽃동네에 방문해 장애가 있는 할머니의 식사를 보조했다. 보조하는 방식과 태도는 ‘반기문 턱받이’로 회자되며 비판받았다. 존엄한 노년을 맞이하며 사회적 돌봄과 지원을 제공받을 권리를 가진 주체로서 당사자를 존중했다면 벌어질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논란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봉사를 했다면 아무 문제 없는 걸까?

배제의 정치, 그 중심에 ‘시설’이 있다. 1970년대 시설 중심의 장애인 복지 정책은 대형 거주시설을 늘렸고, 88서울올림픽 시기에는 도시 미관을 위해 외곽으로 밀려났다. 한센인은 100년 가까이 소록도의 게토화된 지역에서 살아갔다. 가난하고, 더럽고, 뒤틀리고, 어눌하고,  장애나 질병이 있고, 늙고…. 시대별로 다른 이유와 이름으로 시민의 자격을 박탈당하고 시설이란 곳에 모아졌다. 복지와 보호, 안전을 시설 유지의 필요성으로 들지만, 모순적으로 복지와 보호는 통제와 인권침해로 유지된다.

시설의 존재는 사회적 ‘시설화’를 불러온다. 장애와 비장애, 시설과 시설이 아닌 곳을 구분하는 것, 차별은 바로 그곳에 똬리를 튼다. 처음부터 따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사람들로 인식하게 만든다. 구체적인 만남과 접촉이 없는 관계는 개인을 지우고 집단의 정체성만 남긴다. “시설 밖을 나와도 시설”이라는 어느 탈시설 장애인의 말은 단단하게 굳어진 사회적 차별과 혐오에 대한 탄식이다. 그래서 장애인 탈시설 운동은 사회 전체가 장애인 등 특정한 사람들을 배제하고 분리했던 거대한 시설이었음을 폭로하고 변화시키는 운동이다. 시민권을 갖지 못했던 사람들이 ‘시민’의 정의와 권리를 다시 써나가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의 2012년 ‘시설거주인 거주 현황 및 자립생활 욕구 실태조사’에 따르면 13.9%만이 스스로 입소를 결심했다고 한다. 나머지는 자신이 원하지 않았지만 가족 등 주변 사람들의 강력한 권유와 설득에 의하거나 강제적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아갈 수 없었기에 향해야 하는 곳이 ‘시설’인 상황에서 애초에 좋은 시설은 존재할 수 없다.

지난 1일 시설 밖의 자유로운 삶을 주장하며 오랫동안 싸워온 장애계는 장애인 시설 수용 정책을 대한민국의 적폐로 선언했다. 그리고 중앙정부가 거주시설 중심이 아닌 탈시설 전환 계획을 세우라고 촉구하며 5000억원의 예산을 거주시설 지원이 아닌 장애인 자립생활 지원에 쓰라고 소리를 높였다. 제4차 장애인정책종합계획에 100인 이상 장애인 거주시설을 축소하는 계획이 포함된 이후 시설 소규모화가 진행 중이며, 1월 국회입법조사처는 장애인 거주시설 소규모화 정책 개선 방안을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시설화’의 틀에 갇혀 있다는 점이다. 구분하여 살아가야 한다는 발상을 바꿔야 한다. 벚꽃 대선을 준비 중인 주자들에게 보고 싶은 것은 시설과 시설 밖이라는 경계를 무너뜨리고, 얼굴과 이름을 가진 존재로 살아가게 해달라는 장애인들의 요구를 반영한 정책이다. 그렇지 않다면, 입춘대길의 햇살에도 꽃동네엔 꽃이 피지 않을 것이다.

이진희 | 장애여성공감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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