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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다는 사람을 앞에 두고 흔히 저지르는 무례는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뉘는 듯하다. 첫째, ‘네가 그런 일로 힘들면 나는 얼마나 힘들 것 같니’로 시작되는 불행 겨루기 대결. 한마디도 지지 않으려 온 힘을 다해 나의 처지를 설명하고 나면 승자는 온데간데없고 미심쩍은 패배감만 느껴질 뿐이다. 둘째, ‘내가 겪어봐서 아는데, 지나면 별일 아니더라고’로 끝나는 꼰대적 냉소주의. 그의 가르침에 따르면 모든 문제는 시간이 해결해주기 때문에 고민할수록 자괴감만 느껴질 뿐이다. 마지막으로 ‘나도 다 이해하는데 네가 조금만 참아보면 안될까’로 어르고 달래는 게 끝이라 생각하는 상대까지 만나고 나면 우리는 영영 서로의 고통을 나눌 수 없겠구나 하는 무력감마저 든다. 

특히 ‘나도 네 시절을 겪어봐서 아는데 별일이 아니게 될 것’이란 말을 들었을 때 가장 외로웠다. 그 말은 선명히 드러난 문제도 문제가 아닌 것처럼 은폐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청년 문제란 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수많은 기사와 보도는 비참한 삶의 단면을 조명했다. 이때 청년 당사자의 역할은 분명하게 정해져 있다. 안전사고로 숨진 청년의 빈자리에 호출된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 등록금을 감당하지 못해 자살하는 일가족과 엇비슷한 부담을 가진 학자금 대출 이용자, 다리를 쭉 펴고 누우려면 책상 밑에 다리를 넣어야 하는 방에서 생활하는 입주자, 생활비가 부족해 맨밥에 굵은 소금 한 알을 얹어 먹어봤다는 익명의 게시글과 같은 것들이다. 이 모든 것들도 시간이 지나면 아무것 아닌 일들이 되는 걸까.

그렇다고 알아줄 때까지 청년의 가난함을 증명해보자는 방식으로는 그 어떤 낙관도 기대할 수 없었다. 비교적 경제적으로 자유로운 청년의 얼굴들이 등장할 때마다 청년 담론은 힘을 잃어갔다. 빈곤한 생활을 영위하는 생존자가 인터뷰를 통해 증언을 남기는 일만 반복된다는 것은 소비사회에서 청년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증명하는 빈곤 포르노란 방증에 불과했다. 불평등한 구조 속에서 한 세대의 궤도가 가난의 규칙을 찾아가는 동안 빈곤 포르노의 힘을 얻은 청년은 사회적 약자로 규정되어 사회 곳곳에 파견되기에 이른다.

청년 담론이 빈곤 포르노와 완벽한 합을 이루며 시민사회와 정당 곳곳에서 청년단체가 출범하고 행정부에도 청년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사회적 합의체에도 청년 배석이 잇따라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공간에서 청년이라는 정체성으로 호명당한 이들은 손쉽게 들러리가 되고 절차적 민주주의의 정당성을 위한 정족수 중 하나로서 존재할 뿐이란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다. 지난 경사노위 2차 본위원회에서 “여성·청년·비정규직도 중요하지만 보조축”이라는 발언이 용납되었던 것은 개인적 일탈의 문제가 아니라 집단적 무의식에서 비롯된 것임이 분명했다. 청년을 논의의 장 한가운데로 호출한 장본인들은 청년이 어떤 모습을 띠고 있는지는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것만 같았다.

발언대에 오르기 위해선 고통을 전시해야만 할까. 사회적 약자라는 낙인이 있어야만 겨우 제 한 몫을 가질 수 있는 걸까. 아니다. 우리 더 이상 빈곤 포르노의 객체로 소비되지 말자. 말의 주인이 되어 서로의 삶에 귀 기울이며 함께 살아가자. 서로를 완벽히 위로해줄 수 없더라도 외롭게 내버려두진 않을 수 있지 않나.

<민선영 청년참여연대 교육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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