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내 최초의 시급 노동 대가는 4320원이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수습 기간을 적용한 최저임금 90%인 3890원이었다. 첫 아르바이트의 주된 업무는 피자를 만들어 포장하는 일이었다. 4년이 지난 2016년에는 숙련되어 당시 최저임금보다 470원 높은 6500원을 받았지만 필요 이상의 소비를 참아내는 삶은 3890원을 받을 때와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나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근로계약서를 사장님과 나누어 가질 수 있었고 의자에 한 번도 앉지 못한 바쁜 날에는 1시간의 시급을 보너스로 받을 수 있었다. 그래도 야간수당과 주휴수당까지는 챙기지 못했다.

내가 일하던 가게는 대기업 프랜차이즈 피자집이었다. 창업개설비(가맹비·교육비·인테리어비·간판비 등)부터 이따금 불쑥 내라는 광고비, 카드 수수료와 배달앱 수수료까지 나갈 돈은 한두 푼이 아니었다. 이미 계약 당시 예상했던 마진이 나지 않기 시작했는데 같은 상권에 다른 프랜차이즈 피자집 3개가 더 입점하더니 이번엔 하루 주문량이 눈에 띄게 낮아졌다. 그렇다고 가게 임대료를 낮춘다거나 가맹비를 내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엔 사람을 줄였다. 처음엔 3명이 했던 일을 1년 후엔 2명이, 또 1년 후엔 나 혼자서 하게 되었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노조원들이 29일 최저임금 1만원 쟁취를 위해 서울 광화문에서 출발해 청와대 방향으로 3보1배를 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어쩌다 사장님과 최저임금 이야기를 나눴던 적이 있다. ‘그래도 사장님은 저보다 더 많이 버시잖아요!’와 ‘나도 이번 달에는 너만큼밖에 못 벌었어!’라는 내용이었다. 점점 언성이 높아질 때 우린 직감했다. 우리 입장만 우긴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걸. 그 무렵 사장님은 가맹점주협의회를 만들어 낮엔 가게 일을 하고 밤에 활동을 시작했다. 나는 일하지 않는 날엔 시민운동을 했다. 그렇게 사장님과 나는 영업이 끝나면 다른 투쟁을 시작했다. ‘각개전투’라는 말 말고는 서로 외로워지는 싸움을 설명할 수 없었다.

최저임금 인상 논의에서 알바와 사장의 고통은 ‘알바 살리자고 최저임금 올릴 거면 지금 당장 최저임금도 주기 힘든 소상공인의 생계를 책임져라’는 말로 치환된다. 이는 둘 중 하나가 적자생존해야 한다는 무책임한 말이다. 최저임금 인상이 불러오는 몇십억원 손해와 이득이라는 단순한 숫자놀음도 이 난제의 해답이 될 수 없다. 높아진 임금이 내수경제 활성화를 불러올지 소상공인의 멸망을 불러올지는 그 어떤 경제학 논리로도 단언하기 힘들다. 그러니 이젠 최저임금 인상률보다 가파른 곡선을 그리며 높아진 임대료, 그 어떤 규제도 없이 작은 상권에 난립하는 동종 업계들간의 경쟁, 그리고 납득할 수 없는 근거조항으로 징수되는 가맹비부터 헤집어 진짜 해답을 찾아가는 논의를 시작하자.

올해도 어김없이 2018년도 최저임금을 정하기 위한 최저임금위원회 회의가 시작됐다. 최저임금 인상에 전보다 우호적인 정부가 출범했으나 작년과 똑같은 위원들이 앉아있다. 작년 협상 당시 가위바위보로 임금 인상 여부를 결정하는 사용자위원의 추태가 한 다큐멘터리를 통해 드러났다. 구의역, 경산 CU에서 일하다 죽은 최저임금 노동자는 또 다른 노동자로 손쉽게 대체됐다. 노동자가 손쉬운 소모품이 되는 시대, ‘나’라는 존재의 가치를 월급으로 규정하는 시대에서 생계유지도 되지 않는 수준의 최저임금으로 시작되는 최초 노동은 일종의 낙인효과를 가져온다. 최저 인간이라는 낙인에서 벗어나 자존을 회복하는 것이 최저임금 인상의 진짜 이유 중 하나다.

민선영 | 청년참여연대 공동운영위원장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