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자, 유시민은 어용지식인을 자처했다. 어용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권력자나 권력 기관에 영합해 줏대 없이 행동하는 것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유시민은 모욕적 뜻 앞에 ‘진보’를 붙여 진보어용지식인이라는 괴이한 낱말을 탄생시켰다. 이유는 있다. 참여정부 때 청와대만 가졌더니, 재벌, 언론, 검찰, 관료, 야당 등 기존 보수 세력의 반발과 견제에 진보가 무너졌다는 거다. 5년짜리 손님이 한국 사회를 어떻게 바꾸겠나. 그는 개혁에 반발하는 적폐로부터 약한 대통령을 지킬 칼이 되고자 한 것이다. 이를 날카롭게 비판해야 할 지식인의 모습은 어떤가? 역사학자 전우용은 박원순을 가리켜 “그만 한 남자사람친구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라 했고, 김동춘은 “100조원을 줘도 박원순을..
민주주의는 여론을 바탕으로 실현된다. 여론은 개인이나 사회에 대한 의견 중에서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인정된 의견이다. 표현의 자유와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는 이유는, 이것이 여론 형성의 통로이기 때문이다. 정보가 자유롭게 유통되고, 의견이 거리낌 없이 발표될 수 있어야 진정한 여론이 형성될 수 있다. 물론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이라는 책을 쓴 월터 리프먼은 “여론이 국민들의 생각 혹은 객관적인 사실을 모은 것이 아니라 대개는 권력효과에 의해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구호일 때가 많다”고 했다. 그렇다고 해도 여론을 무시한 현실정치는 불가능하다. 대부분 정책의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여론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 형성된다. 아고라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인 폴리..
선거민주주의란 것이 민의를 표현하기 전에 먼저 대리인을 자처하는 자들의 수준을 끝없이 확인해야 한다는 것은 고역이다. 더구나 과연 이것이 민주적인가? 민의와 상관없이 그 민의를 대표할 대리인들이 선정되는 것이. 무엇이 저들을 대선후보라고 정했는가? 여론조사? 지지율? 과연 그것이 민의를 얼마나 반영할까? 한국의 정치인 지지율 조사가 얼마나 그릇되고 조작되고 바람몰이용인지는 이미 지난 18대 대선에서 충분히 폭로된 바 있다. 결국 대의민주주의로 불리기도 하는 자유민주주의는 선출된 자들(the elected) 가운데 고르기 게임이다. 즉 ‘자격 갖춘 자들’(the elite) 중에서 고르는 정치게임. 1987년 헌법으로 재개된 대통령 직선제도 마찬가지다. 내 주권은 선거일과 선거일을 앞둔 얼마 동안만 작동한..
“국민들이 선거 날만 주인이 되고 투표가 끝나면 다시 노예로 돌아가는 제도.” 사회계약론으로 유명한 18세기 철학자 장 자크 루소는 현대정치, 현대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대의 민주주의를 이렇게 비판한 바 있다. 최근 온 나라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촛불을 바라보면서, 정치학자로서 가장 자주 떠오르는 것은 이 비판이다. 그렇다. 2012년 12월19일 우리는 주권자로서 한 표를 던졌다. 그러나 그 이후 지난 4년 가까운 기간 동안, 다른 후보를 찍은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박근혜를 찍은 사람들까지, 박근혜의, 아니 최순실의 ‘노예’에 불과했음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다. 국회는 어떠한가? 보수야당들조차도 분노의 촛불이 광화문에 넘쳐나기 전까지는 기껏해야 ‘질서 있는 퇴진’ ‘명예로운 ..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믿었다. 김주열의 피로, 경무대 앞에서 쓰러진 학생들의 피로 4·19혁명이 이뤄졌다. 박종철, 이한열, 그리고 자신의 몸을 불사른 많은 열사들의 피는 1987년 6월항쟁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자유를 위해 비상해 본 사람이면 안다. 자유에는, 민주주의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다는 걸. 어느새 아득한 시절이 돼 버린 전두환·노태우 군사정권 시절. 학교엔, 거리엔 화염병과 최루탄, 쇠파이프와 곤봉이 난무했다. 그걸 당연시했다. 이렇게 온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고는 독재정권을 무너뜨릴 수 없다고 믿었다. 요즘은 민주주의가 촛불을 먹고 자란다. 100만명, 200만명이 촛불을 들고 권력자를 쫓아내려는 집회와 행진을 이어가지만 경찰과의 충돌은 없다. 전두환·노태우 정권 시절엔 지금 박..
지난 주말 촛불집회는 대한민국 시위의 새 역사를 썼다. 전국을 밝힌 190만 촛불은 사상 최대 규모요, 촛불의 절정이었다. 춥고 눈·비가 내린 궂은 날씨에도 훼손된 민주주의를 시민 손으로 직접 되살리려는 촛불은 횃불로, 들불로 번져 활활 타올랐다. 시민들은 활력이 넘쳤고 외침은 엄중했다. 시민들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직접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청와대를 동·남·서쪽으로 에워싼 인간띠 잇기는 청와대를 포위하며 행진을 벌였다. 6살 아들과 함께 나온 젊은 엄마는 “이미 민심이 대통령을 이겼다”고 했다. 시민들은 아무도 보지 않는 골목길에서도 버려진 손팻말 등 쓰레기를 주웠다. 광화문광장을 일순간 암흑으로 바꾼 ‘1분 소등 행사’에서 시민들은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고 외치며 다시 불을 붙였다. 감동과 전율..
오늘 시위가 만들어내는 감동적인 장면들의 한 주인공은 10대들이다. 그들은 이번 시위에서 최초이자 거의 유일하게 ‘혁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급진적인 성인들도 꺼렸을 단어를 그들은 거리낌없이 내걸었고, 이 싸움이 박근혜 퇴진을 넘어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일임을 환기했다. 아무래도 우리는 감동할 것 하나를 빠트린 듯하다. 우리는 그들에게 그런 걸 거의 가르치지 않았다. 우리가 가르친 건 이 고약한 자본 체제에서 나만 살아남는 법이었고, 그들의 미래를 위한 최선이라 믿었다. 그런데 혁명이라니, 세상에. 나는 잠시 어쭙잖은 감회에 젖는다. 15년 전 어느 날, 불현듯 나는 한국의 아이들이 전에 없던 특별한 상황에 처해 있음을 발견했다. 동네에서 뛰어놀던 아이들이 일제히 사라졌다는 것과 함께 늘 이어오던..
며칠 전 지인이 갑자기 물었다. 최순실·박근혜 게이트 때문에 각 당의 유력 대선후보들이 내년 대선에 어떤 공약을 새로 내놓을 것 같은가라는 질문이었다. 사실 이에 대한 답변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지금까지 비슷한 사건들이 벌어졌을 때 정치인들이 내놓은 대안들이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내년이 되면 청와대 제2부속실 폐지나 청와대 이전, 대통령의 사적관계에 대한 철저한 정리 등이 정당과 정치인들의 새로운 약속으로 제시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무엇을 없애거나 더 도덕적이겠다는 선언을 한다고 문제의 본질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박 대통령은 세월호 사고 이후 해경을 해체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해경은 실제로는 해체되지 않았고 오히려 관료조직은 더 커졌으며 한편에서는 최근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