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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들이 선거 날만 주인이 되고 투표가 끝나면 다시 노예로 돌아가는 제도.” 사회계약론으로 유명한 18세기 철학자 장 자크 루소는 현대정치, 현대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대의 민주주의를 이렇게 비판한 바 있다. 최근 온 나라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촛불을 바라보면서, 정치학자로서 가장 자주 떠오르는 것은 이 비판이다.

그렇다. 2012년 12월19일 우리는 주권자로서 한 표를 던졌다. 그러나 그 이후 지난 4년 가까운 기간 동안, 다른 후보를 찍은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박근혜를 찍은 사람들까지, 박근혜의, 아니 최순실의 ‘노예’에 불과했음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다. 국회는 어떠한가? 보수야당들조차도 분노의 촛불이 광화문에 넘쳐나기 전까지는 기껏해야 ‘질서 있는 퇴진’ ‘명예로운 퇴진’을 주장하며 몸조심하기에 바빴다. 박근혜의 지지율이 4%로 떨어지고 국민의 80%가 탄핵을 지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누리당 친박계는 아직도 탄핵에 반대하고 있다. 이정현·김진태 의원을 뽑은 순천과 춘천 시민들이 박근혜의 사수대 역할이나 하라고 이들을 국회에 보낸 것인가? 비박계 역시 오락가락하다가 지난 주말 촛불에 놀라 뒤늦게 탄핵 합류를 선언했지만, 언제 다시 마음이 변할지 모른다. 한국 대의 민주주의는 중병에 걸려있다. 만일 탄핵안이 국회에서 부결된다면 사망선고를 받는 것에 다름 아니다.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이 5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개최한 촛불문화제에서 많은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박근혜 대통령 탄핵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준헌 기자

인구가 증가하고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우리는 대의 민주주의를 어쩔 수 없는 ‘현대정치의 유일한 대안’으로 간주해 왔다. 그러다가 최근 들어 문학의 ‘재현(representation)’ 논쟁이 불붙고 인터넷의 발달 등으로 직접 민주주의의 가능성이 커지면서 대의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적 재평가가 간헐적으로 진행됐다. 재현이란 어떤 사물을 다시 형상화하는 것인데 재현이 대상을 그대로 표현할 수 없듯이, ‘대의’ 역시 불가피하게 민의의 왜곡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이 같은 부분적 재평가를 넘어서 대의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물론 이번 촛불항쟁의 밑바닥에는 단순한 권력남용을 넘어 헬조선, 흙수저, 신분세습제에 대한 분노가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논의를 정치 문제로 국한시킨다 하더라도, 우리의 문제는 단순히 박근혜를 몰아낸다고, 문제의 근원으로 지목되고 있는 ‘87년 헌정체제’(제왕적 대통령제)를 타파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설사 내각제로 정부 형태를 바꾼다고 하더라도 탄핵 과정이 잘 보여주듯이 ‘국민을 대표하지 않는 대통령의 독재’를 ‘국민을 대표하지 않는 국회의 독재’로 바꾸어놓을 따름이다. 다시 말해 이번 문제의 핵심에는 루소가 고발한 대의 민주주의의 근본적인 문제점이 자리 잡고 있다.

촛불을, 광장을 주목해야 하는 진정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단순히 박근혜를 몰아낼, 아니 이미 몰아낸 힘이 거기서 나왔기 때문만이 아니다. 대의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계기와 가능성을 촛불과 광장이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 이후에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새로운 공화국’의 단초들을 그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광장은 전국 1500개 시민사회단체가 밑으로부터 퇴진운동조직을 만들면서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광장을 메우고 있는 것은 일반시민이다. 구체적으로 1500개 조직의 조직화된 참여자는 20만명 수준이며, 90%는 일반시민이다. 직접민주주의가 폭발한 것이다. ‘운동 내에서의 직접민주주의적 계기’들도 주목해야 한다. 주요 단체의 대표들이 단상에 포진하고 의례적으로 발언을 과점하는 ‘운동 내의 대의제’가 약화되고 참가자들이 자유롭게 발언권을 갖는 직접민주주의가 강화되고 있다. 일부 운동권의 돌출적 행동에 대해서도 대중들이 비판하고 규율하고 있다. 탄핵 결과와 상관없이 이제 민선공직자 소환제 강화 등 대의제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수술하고 직접민주주의적 기제들을 극대화해야 한다. 대의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손호철 | 서강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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