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8월14일,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이었습니다. 27년 전, 고 김학순 할머니께서 강철보다 단단한 벽을 넘어 너무나도 어렵게 그러나 너무나도 당당하게 수많은 기자들이 모인 곳에서 자신의 경험을 밝힌 날이었습니다. 자연스러운 남성의 성욕이자 여성의 숙명으로 여겨져 피해자가 감추어야 할 정조에 관한 죄일 때, 가문의 수치이자 민족의 수치로 손가락질당할 때, 바로 그 일이 가부장제와 식민주의, 군사주의가 공모한 어마어마한 성폭력 범죄행위임을 낱낱이 전 세계에 알린 그날이었습니다. 가족과 공동체, 국가가 모두 외면하던 시절, 피해자가 생존자로 다시 활동가로 거듭나면서 수많은 다른 피해자들의 손을 잡기 시작한 그날, 전 세계를 돌며 ‘거리에서, 강연장에서, 법정에서’ 피해 사실을 알리고 진실을 규명하고자 ..
안희정 전 충남지사를 향한 ‘미투(#MeToo·나도 고발한다)’는 한국의 미투 운동이 새로운 분수령을 맞았음을 웅변한다. 서지현 검사의 ‘안태근 전 검사장 성추행’ 폭로로 본격화한 미투는 문화예술계로 확산되었으나, 그 파장이 정·관계 등 현실권력의 본산까지 미치게 될지는 불투명했다. 그러나 유력한 차기 대선 주자마저 도도한 물결 앞에 추한 맨얼굴을 드러내면서, 미투는 거대한 변혁운동으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두려움을 딛고 목소리를 낸 피해자들이 한국 사회의 위선과 폐습을 폭로하며 기득권 이데올로기를 깨부수고 있다. 더 이상 성역은 없다. 안 전 지사의 비서 김모씨가 밝힌 내용은 충격적이다. 지난 5일 JTBC에 출연한 김씨는 지난해 6월부터 8개월 동안 안 전 지사로부터 4차례 성폭행당했고 성추행도 수시로..
안희정은 비운의 세자다. 2002년 12월21일. 노무현 대통령 당선인은 가족과 함께 제주도로 갔다. 안희정도 불렀다. “국민 앞에 털어야 할 것이 있다면 미리 다 털고 가자.” 안희정은 1994년 노무현을 만난 이후 줄곧 살림을 담당했다. 안희정은 대선자금 수수 총대를 메고 구속됐고,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문재인은 “안희정은 정말 가혹하게 당했다. 본인 책임이 아닌 일까지도 안아버렸다. 민정수석으로서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내 처지가 원망스러웠다”고 했다(문재인의 ). 함께했던 많은 사람들이 청와대·정부로 입성할 때 안희정은 바깥에 혼자 남았다. 청와대에 들어가면 정원에서 삼겹살 파티 한번 하자던 그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안희정은 “본진은 앞으로 출발하고 나 혼자, 다리 부상 입은 놈이 혼자 ..
대통령 선거전이 본격화되면서 후보 간 경쟁이 정책 대결이 아니라 말꼬리 잡기와 흠집 내기로 흐르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의 ‘표창장’ 논란이 대표적이다. 문 후보가 토론회에서 특전사 복무 시절 사진을 보여주며 “전두환 여단장으로부터 표창받기도 했다”고 소개하자 민주당 안팎의 대선후보들이 융단폭격하듯 비판을 쏟아냈다. 비판의 여지가 없지는 않지만 그렇게까지 크게 문제 삼을 일이었는지 의문이 든다. 또 자유한국당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조사 끝에 별문제가 없다고 발표한 문 후보 아들의 대기업 입사에 대해 연일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이번 대선에서 정책 토론은 어느 때보다 더 중요하다. 경제와 민생, 외교안보, 노동 등 해결이 시급한 현안들이 산적해 있다. 후보 간 치열한 토론을 통해 공약을 검증해야 ..
지난 칼럼에서 안희정 충남지사와 이재명 성남시장의 ‘2등 경쟁’을 지켜보겠다고 했다. 한 달이 흘렀다. 하지만 지금 시간과 순위를 따지는 게 무의미할 정도다. 2017년 대선 정국이 안희정으로 요동치고 있다. ‘공적 됨됨이.’ 십수년간 지켜본 정치인 안희정에 대한 주관적 평가다. 1990년 3당 합당 후 이념도 정치도 헌 옷처럼 느껴져 여의도(이철 의원 비서관)를 나설 때, 1993년 친구 이광재와 서울 연신내 허름한 술집에서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를 도원결의 할 때, 2002년 노무현 정부 출범 후 홀로 멍에를 짊어졌을 때도 안희정은 조직과 대의명분이 우선이었다. 2007년 대선 패배, 2008년 총선 공천 배제 땐 ‘폐족’이란 말로 친노를 일으켜 세웠다. 스스로의 자리가 보장되지 않는 혁명을 결코 ..
안희정 지사의 지지율이 무서운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보수 후보들의 지지율이 전혀 오르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보수층 유권자들의 표심은 갈 곳을 잃었다. 본인의 애매한 자세에도 불구하고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의 지지율이 높은 편이지만, 막상 ‘권한대행의 권한대행’을 임명하고 출마할 경우 불어닥칠 후폭풍은 간단치 않을 것이다. 황 대행이 그 후폭풍을 뚫고 당선될 꿈을 꿀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다고 본다면, 정치적으로 보이는 그의 행보는 대선보다는 다른 목표를 향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안 지사의 최근 지지율 상승은 갈 길 잃은 보수와 문재인 전 대표에게 불안감을 느끼는 중도층의 지지에 힘입은 바가 크다. 1987년 이후 모든 선거에서 야권을 항상 불리한 출발선에 세웠던 기울어진 운동장이 이번에는 실질적으로..
매주 토요일 광화문 촛불집회는 거대한 민주주의 야시장이다. 지난 석 달 동안 야시장 풍경은 분명 달라졌다. 탄핵이라는 절대 목표가 있던 때는 절박하게 뭉쳤다. 지금은 저마다 마음속 광장에서 다양한 담론의 분화가 일어나는 중이다. 마치 묵은 낙엽 위에 또 낙엽이 쌓여 숲은 잊혀져가지만 어느새 수많은 나무가 자라고 있는 것처럼. 광화문 한 사케집은 붐볐다. 우리 일행은 작은 테이블을 앞에 두고 파전과 어묵탕을 주문했다. 750㎖ 사케 반병은 차게, 또 반병은 따뜻하게 데웠다. 어묵탕 국물이 말갛게 끓어오를 때쯤 우린 광장 숲더미에서 골라온 나무를 꺼내보자고 했다. 가장 최근에 대선 출마를 선언한 이재명 성남시장과 안희정 충남지사다. 두 사람은 많이 다르다. 세상을 대하는 방식도 이 시장은 “물이 반밖에 없는..
여야 유력 정치인들이 속속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있다. 앞선 주자는 대세론을 주장하고, 후발 주자들은 ‘제3지대’ 연합이니 야권 공동경선 등을 제안하고 있다. 남경필 경기지사와 안희정 충남지사 등 젊은 후보들은 세대교체와 정책 중심의 경쟁을 외치지만 정국을 주도하지는 못하고 있다. 심상정 정의당 대표의 ‘슈퍼우먼방지법’ 공약과 유승민 바른정당 의원의 ‘육아휴직 3년 보장법’, 이재명 성남시장의 기본소득 정책 등도 이목은 끌었지만 의제로 떠오르진 못했다. 오히려 유력한 대선주자들일수록 특정 지역에 한정된 약속들만 내놓고 있다. 현안에 대한 해법이나 국가 미래를 좌우할 정책 제안보다는 유리한 경쟁 구도 만들기에 집중하는 상황이다. 대선은 정당과 후보들이 시민들의 요구를 반영하고 사회문제에 대한 해법을 공약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