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트콜텍’은 오랜 시간 동안 나에게 너무 익숙하고 안쓰럽고 분노를 부르는 이름이었다. 사람에게는 튼튼한 벽과 지붕이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내가 콜트콜텍의 해고노동자들을 목격했던 곳은 죄다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는 시내 한복판 한쪽에 자리 잡은, 너무나도 빈약해 보이는 천막이었다. 그리고 그 목격담은 마치 유령처럼 장소를 옮겨가며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부끄럽게도 나는 이제야 그 지난한 투쟁이 콜트와 콜텍의 공동투쟁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3년 만에 사측으로부터 ‘유감 표명’과 ‘합의금’을 받게 된 것은 1988년에 설립되고 통기타를 만들던 콜텍이고, 1973년에 설립되어 전자기타를 만들던 콜트에서 해고된 노동자는 여전히 대법원 앞에서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나는 노동자 싸움의 현장에 갈 적마다 마치 온몸이 불붙는 화살처럼 소리소리 달려가곤 한다. 그러다가도 남몰래 흥얼대는 노래가 하나 있다. 얼마 앞서는 쌍용차 노동자 김득중이 “선생님, 이참엔 굶어죽는 싸움으로 결판을 내고야 말겠습니다”라며 돌아간 뒤에도 나는 남몰래 노래를 불렀다. 무슨 노래일까. ‘섬집아기’라는 애들 노래지만 거기에 얽힌 이야기는 이렇다. 내 나이 열여덟, 전쟁이 한창일 적 전선에서 돌아가신 형님의 유해라도 찾겠다며 부산에서 영등포로 가는 기차에 몰래 타긴 했는데 밀양인가부터 기차가 멎고는 가질 않는 거라. 몇 날을 굶어서 배는 고프지 눈보라는 치지 꽁꽁 얼붙던 그때 그 숨죽은 그 역 앞마당. 하지만 그 침묵을 깨는 게 있었다. 달걀장수 아줌마가 어린 애를 포대기에 싸서 눈더미 위에 올..
지난 4월20일. 콜트콜텍 기타 만들던 노동자들이 정리해고 3000일을 맞아 뒤늦게 배운 기타를 메고 전국 유랑을 떠났다. 첫 행선지는 진도 팽목항. 1주기 추모가 끝난 너무도 쓸쓸한 현장. 하지만 목 잘린 채 살아온 3000일의 아픔이, 생활의 맨 밑바닥에서 작은 실낱 하나를 찾아 허우적이며 살아온 3000일의 고통이 오히려 우리 시대 가장 아픈 현장을 찾게 만들었다. 다음날엔 제주도 강정마을을 거쳐 재개발반대 싸움을 이어가고 있는 부산 만덕공동체와 ‘생탁’ 송복남님과 한남교통 심정보님이 고공농성 중인 부산시청 앞 광고탑을 찾는다. 25일엔 밀양 송전탑 반대 할매할배들을, 26일엔 구미 스타케미칼 차광호씨의 고공농성장을 찾는다. 30일엔 강원도 홍천의 골프장반대 주민들을 만나 아직도 서툴기만 한 기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