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이하게도 우리나라 헌법에는 기본권 조항에 모두 주어가 있다. 미국도, 독일도, 일본도 기본권 조항에 일일이 주어를 넣지 않았다. 학문, 예술, 표현의 자유를 규정한 조항을 보면 외국 헌법에는 딱히 주어가 없고, 간혹 있어도 ‘모든 사람’이다. 독일 헌법은 “예술과 학문, 연구와 강의는 자유이다”이고, 일본 헌법도 “학문의 자유는, 그것을 보장한다”이다. 우리 헌법만 국민을 주어로 적어 “모든 국민은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가진다”고 했다. 한국에서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보장받으려면 국민이어야 한다. 실제로 한국의 기본권 주체는 국적자이며 외국인은 제외된다고 임기 내내 주장한 헌법재판관도 있다. 이렇게 독특한 구조는 일본이 1945년 패전 전까지 쓰던 대일본제국 헌법(메이지헌법)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헌법을 고치자는 움직임이 나올 때마다 헌법을 쉽게 풀어써야 한다는 주장이 빠짐없이 나왔다. 지난 1980년 봄에도 그런 주장이 있었고 1987년 6월 항쟁 이후에도 그런 주장이 고개를 들었으나 뜨거운 쟁점이 너무 많고 이런 주장에 귀 기울이는 사람마저 적어서 그냥 스쳐 가는 주장에 지나지 않았다. 30년도 더 지난 이제 이런 여론이 한글문화 단체를 중심으로 다시 일어나고 있다. 얼핏 보기에 별 것 아닌 이 문제는 오랜 우리 역사의 병폐와 맞물려 있는 해묵은 과제라고 하겠다. 우리 헌법은 1940년대 문체로 돼 있다. 그때만 해도 한글로만 쓰기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중국 글자를 섞어 썼고 어려운 한문 투 일본어 번역 투 표현도 많다. 헌법은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에서도 우리말다워야 한다. 우리말글의 헌법..
12월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경남 창원에서 열린 촛불집회 연단에 24세 청년이 올라왔다. 유튜브를 통해 본 영상에서, 그는 20세에 취직해 4년째 최저임금을 받고 있는 전기공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세금 떼고 나면 손에 쥐는 월급이 120만원인데, 방세와 교통비, 식비, 공과금을 내고 나면 저축을 할 돈이 남지 않는다고 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지만, 지금의 월급으로는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린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다고 했다. 그는 궁금해서 촛불집회에 나왔다고 말했다. 그는 박근혜 퇴진 이후에 자기 삶이 나아질 수 있는지가 궁금하다고 했다. 1987년에도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고, 그다음에 노동자들이 대투쟁을 해서 임금도 오르고 삶이 나아졌다고 알고 있는데, 이번에도 그렇게 될 수 있는 건지 궁금하다고..
정치권에서 개헌론이 분출하고 있다. 여당의 분당으로 신4당 체제로 정치권 구도가 재편되면서 개헌을 매개로 한 대선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개헌론자들의 주장은 박근혜 게이트처럼 대통령의 막강한 권한이 문제가 되니 개헌을 통해 이를 해소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권한을 분산시키자는 주장, 5년 단임제를 4년 중임제로 고치자는 의견도 있다. 1987년 체제 이후 강화된 시민의 정치·사회적 권리를 헌법에 반영해야 한다는 논리도 있다. 하지만 지금 제기되는 개헌론은 생각해봐야 할 점이 많다. 우선 정치권이 당장 개헌 논의를 시작하면 모든 이슈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인다. 그런데 이번 촛불집회에서도 드러난 것처럼 시민들의 요구는 단순한 개헌이 아니다. 특권과 반칙으로 점철된 구체제의 개혁과 일신이다. 개헌론..
지난 12일 여야 3당은 내년 1월부터 6개월간 국회 개헌특위를 운영키로 합의했다. 위원은 새누리당 8명, 민주당 7명, 국민의당 2명, 비교섭단체인 정의당 1명 등 총 18명으로 구성하고, 위원장은 새누리당이 맡기로 했다. 탄핵 시국에서 개헌 추진 자체에 대한 논란도 있고 개헌 내용에 대해서도 다양한 의견이 분출되고 있는 상황에서 어떠한 방향으로 개헌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에 앞서 개헌 논의를 국회에만 맡겨둬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개헌의 방향에 대한 여야 간 입장이 첨예하게 갈리고, 같은 당 안에서도 생각의 차이가 있는 상황에서 개헌안 마련을 의석수에 비례한 국회 특위에 맡길 경우 과연 가능할까. 국회는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선거구획정조차 입장 차이로 법정시한을 넘겨 처리했다. 선거구를 ..
촛불을 계기로 헌법을 다시 볼 기회가 생겼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이전에는 헌법 문구들을 당위적으로 대했다. 이번엔 사뭇 달랐다. 조항을 읽을 때마다 촛불을 켜는 정성이 생각나고 광화문 거리를 걸었던 해방감이 밀려왔다. 촛불파도가 넘실거리듯, 단어들이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몇 번의 촛불 참여가 이러한데 처음 민주공화국을 외치며 쓰러져간 사람들은 어땠을까? 복지국가도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국민은 행복추구권과 인간다운 생활권을 지니고 국가는 이를 보장해야 한다는 조항들, 헌법의 명령이 바로 복지국가였다. 며칠 전 빨라진 대선에 관해 토론하다 지인이 물었다. 복지시민단체는 무엇을 내세울 거냐고. 복지 쪽에선 어떤 요구가 있을지 궁금하고 획기적인 게 나올까 하는 의문이 담긴 질문으로 들렸다. 한두 해 전부턴 ..
우리 헌법 본문 앞에는 전문(前文)이 있다. 헌법학자들은 이 전문이 본문의 각 조항을 지배하는 근본원리로서, 헌법의 본질적 부분을 이루는 ‘헌법의 헌법’이라고 본다. 그래서 헌법 전문은 당연히 헌법규범의 단계적 구조 중에서 본문에 우선하는 최상위의 근본규범이 된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으로 시작하는 헌법 전문에는 곧이어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는 부분이 나온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부정선거로 헌법을 유린하고 측근들의 부정축재를 용인한 이승만 정권에 대항한 시민혁명이 4·19혁명이다. 이리하여 4·19 시민혁명의 이념은 현재를 사는 대한민국 국민이 헌법과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계승해 가야 할 이념이 된다. 지난 주말 5차 촛불집회는 서울 광화문에 150만명..
100만 군중이 매주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거리의 의회’를 열고 있다.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을 능가하는 분노의 함성과 외침이 만추의 광화문광장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에서 드러난 ‘권력의 사유화’로 박 대통령은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상실하고 통치불능의 상태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 무신불립(無信不立)이라 했듯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상실한 지도자는 국가를 이끌어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1974년 7월25일 워터게이트 사건에서 범죄행위를 저지른 닉슨 대통령을 탄핵 소추한 하원 법사위원회에서 바버라 조던 하원의원은 “국민의 공적신뢰(public trust)를 배신한 대표는 탄핵될 수 있다”고 연설하였다. 대의 민주주의하에서 주권자인 국민은 대표에게 권력을 한시적으로 ‘위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