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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에서 개헌론이 분출하고 있다. 여당의 분당으로 신4당 체제로 정치권 구도가 재편되면서 개헌을 매개로 한 대선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개헌론자들의 주장은 박근혜 게이트처럼 대통령의 막강한 권한이 문제가 되니 개헌을 통해 이를 해소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권한을 분산시키자는 주장, 5년 단임제를 4년 중임제로 고치자는 의견도 있다. 1987년 체제 이후 강화된 시민의 정치·사회적 권리를 헌법에 반영해야 한다는 논리도 있다.

하지만 지금 제기되는 개헌론은 생각해봐야 할 점이 많다. 우선 정치권이 당장 개헌 논의를 시작하면 모든 이슈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인다. 그런데 이번 촛불집회에서도 드러난 것처럼 시민들의 요구는 단순한 개헌이 아니다. 특권과 반칙으로 점철된 구체제의 개혁과 일신이다. 개헌론자들은 개헌에 이런 개혁 과제들을 담아낼 수 있다고 하지만 실현 가능성이 의심된다. 당장 대선 정국과 맞물려 개헌의 본래 취지는 뒷전으로 밀리고 개헌파와 비개헌파로 나뉘어 권력을 잡는 일로 날을 지새울 게 뻔하다.

개헌론은 특히 대통령에 대한 권력 집중을 문제점으로 지적한다. 하지만 한국 정치가 후진성을 면하지 못하는 것은 헌법 그 자체 때문이 아니다. 헌법의 문제에 앞서 민주주의의 기본 프로세스 자체가 작동하지 않은 탓이 크다. 기존 헌법에도 책임총리제 등 권력 분산의 요소가 다 들어있다. 더구나 촛불시민들의 요구대로 개혁을 한다면 대통령에 대한 권력 집중과 부정부패 등은 충분히 해소할 수 있다. 개헌까지 갈 것도 없이 여야 정치권과 검찰, 언론이 제 기능을 다한다면 제왕적 대통령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출처: 경향신문DB

설령 권력 체제를 개편한다 해도 내각제나 대통령제, 이원정부제 가운데 무엇이 최상인지 합의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내각제와 대통령제가 다 문제라면 이번에는 이원정부제를 도입해야 하는데 현대정치에서 내치와 외치를 구분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대통령의 권력이 너무 강하다고 해서 권력해체에만 집착하면 또 다른 폐해를 낳을 수 있다. 대통령이 권한을 가지고 책임있게 국정을 운용할 수 있는 길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가능성이 있다.

개헌의 또 다른 맹점은 정치세력들이 저지른 실책을 한꺼번에 덮어버린다는 것이다. 대선은 지금까지 어느 정치세력 또는 어떤 정치인의 잘잘못을 가리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런데 개헌은 모든 것을 제도의 결함으로 치부하기 때문에 모든 대선후보를 동일선상에 놓아버린다. 여당과 그 지도자의 실정에 대한 심판이나 야당 정치인의 잘못된 정치적 선택을 바로잡으려는 시도도 다 소용이 없어진다.

당초 개헌론은 지난 10월 수세에 몰린 박근혜 대통령이 제기했으나 정략적 접근이라는 비판으로 수그러들었다가 탄핵 가결 후 재등장했다. 여당은 물론 야당 일부까지 가세해 만병통치약으로 둔갑시키고 있다. 지금 개헌론은 개헌 그 자체보다 개헌을 매개로 자기 정파의 정치적 이득을 챙기는 데 목표가 있다. 현 정치 구도가 대선을 치르기에 불리하다고 판단한 정치인들이 개헌을 고리로 힘을 모아 상황을 바꾸려는 것이다.

지금 개헌안은 구체성이 결여돼 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개헌이 가능하지도 않다. 개헌 방향에 대한 합의조차 없는데 언제 민감한 헌법 조항까지 합의해 통과시킬 수 있을 것인가. 대선 국면에서의 개헌은 시민의 참여 기회도 제약한다. 그래서 지금 개헌을 주장하는 것은 당략적 접근일 수밖에 없다. 정치인들만의 개헌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 개헌은 시민의 뜻을 충분히 모아야 한다. 대선 공약으로 제시하고 심사숙고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정치권은 이제 개헌론의 수렁에서 벗어나야 한다. 시민들이 요구한 개혁 과제를 입법화하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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