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전 대통령이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시민들에게 발포 직전 헬기를 타고 광주에 내려와 회의를 주재했다는 의혹이 새롭게 제기됐다. 5·18 당시 주한미군 정보요원 출신 김용장씨는 13일 기자회견을 열어 “이때 사살 명령을 내린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그간 여러 의혹은 많았지만, 5·18 집단발포 책임자로 전 전 대통령을 지목한 증언이 나온 것은 처음이다. 그는 “일명 ‘편의대’라 불리며 시민행세를 했던 사복군인들이 존재했다”며 “5월20일 ‘성남에서 C-130 수송기를 타고 온 30~40명이 K57 광주비행장 격납고에 주둔하면서 민간인 버스를 타고 광주 시내로 침투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직접 격납고로 찾아가 제 눈으로 재차 확인했다”고도 했다. 충격적인 내용이다. 국방부는 이런 증언에 ..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공군 수송기로 ‘시체’를 옮겼다는 군 기록이 나왔다. 육군본부가 1981년 6월 작성한 ‘소요진압과 그 교훈’이라는 문건에는 5·18 당시 공군 수송기 지원 현황이 상세하게 적혀있다. 이 가운데 5월25일 광주~김해 구간에는 의약품과 수리 부속품을 운송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비고란에 ‘시체(屍體)’라고 적혀있다. 군은 임무 수행 중 사망한 군인을 ‘시체’라고 하지 않고 ‘영현(英顯·죽은 사람의 영혼을 높여 부르는 말)’으로 기록한다. 게다가 당시 오인 사격 등으로 사망한 군인 23명의 시신은 모두 성남비행장으로 옮겨졌다. 이 때문에 5·18 당시 공군 수송기가 김해에서 의약품 등을 싣고 광주로 왔다가 돌아가면서 계엄군에 의해 희생된 민간인 시신을 빼돌린 것 아니냐는 의혹이..
초등학교 6학년 때 불심검문을 당한 적이 있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가는 길이었는데 경찰관이 붙잡아 세웠다. “어디 가니? 책가방 좀 열어봐.” 불쾌했으나 두려움이 불쾌함을 압도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고약한 장난이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그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옆 동네에 전두환이 살았기 때문이었다. ‘옆’까지의 거리는 꽤 됐지만, 대학생들의 시위(그땐 데모라고 했다) 소식이 들려오면 우리 동네까지 분위기가 달라졌다. 무전기를 든 경찰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대통령이 근처에 사니 치안걱정 안 해도 돼 좋다는 소리도, 얼굴 한 번 보지도 못한 대통령 때문에 평범한 사람들이 불편해진다는 소리도 들렸다. 전두환이 사는 곳은 어디쯤인지도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멀고 아득한 느낌이어서 어릴 적 그의 이미지는 마치..
자유한국당 김병준 비상대책위원장이 뒤늦게 사과와 함께 ‘5·18 망언’ 3인방을 당 윤리위에 회부해 뒷북 징계 수순에 들어갔지만, 사과의 진정성을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다. 과연 반헌법적 망언의 무게에 걸맞은 강력한 징계를 결행할 수 있을지도 의문인 데다 당사자들의 적반하장 행태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5·18 망언을 쏟아낸 김진태·이종명·김순례 의원은 사죄는커녕 ‘허위 유공자’ ‘북한군 개입’을 들먹이며 망발을 이어가고 있다. 5·18민주화운동을 ‘폭동’이라고 규정한 이 의원은 ‘북한군 개입 검증’과 ‘5·18유공자 명단 공개’를 조건으로 의원직 사퇴를 운위했다. 5·18유공자를 ‘괴물집단’이라고 매도했던 김순례 의원은 ‘사과문’이란 걸 내면서 “허위 유공자를 걸러내야 한다”고 또다시 희생자들을 욕보..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인권유린과 발포 책임자, 집단 학살 등을 밝히기 위한 5·18 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이제야 가동하게 됐다. ‘5·18진상규명특별법’이 지난해 2월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돼 9월14일부터 시행됐지만, 자유한국당이 자기 몫 위원 3명의 추천을 미루면서 넉 달이나 출범이 지연됐다. 법원에서도 허위사실로 판명난, 허무맹랑한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한 극우 논객 지만원씨 추천 논란 때문에 그랬다니 개탄스러울 따름이다. 한국당이 애초 진상규명 의지가 있기나 한 건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한국당이 뒤늦게 추천한 위원에도 극우세력의 주장을 대변해온 인사들이 주로 포함돼 우려스럽다. ‘월간조선’ 기자 출신으로 현재 도서출판 ‘자유전선’ 대표인 이동욱씨는 1996년 월간조선 4월호에 ‘검증, ..
5·18민주화운동 관련 사건 재판에 나오지 않고 있는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구인영장이 발부됐다. 광주지법은 지난 7일 열린 재판에 전씨가 건강 상태를 이유로 불출석하자 다음 공판기일을 3월11일로 지정하고 그날까지 유효한 구인영장을 발부했다. 다음 공판에도 정당한 사유 없이 불출석할 경우 강제로라도 법정에 세우겠다는 뜻이다. 전씨가 갖가지 이유를 들어 재판을 회피해온 만큼 당연한 조치다. 전씨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5·18 당시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에 대해 “가면을 쓴 사탄”이라고 표현한 혐의(사자 명예훼손)로 지난해 5월 기소됐다. 이후 전씨 측은 재판 연기를 신청하고 관할 법원을 옮겨달라고 요구하는 등 재판을 고의로 지연시킨다는 의혹을 받아왔다. 지난해 8월 첫 재판에는 ‘알..
전두환 정권이 5·18 관련 자료를 조직적으로 조작·왜곡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 헬기사격 의혹 등을 조사 중인 국방부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는 “1985년 구성된 ‘80위원회’ 등을 통해 5·18 관련 역사적 사실이 왜곡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그 진상을 추적하고 있다”고 밝혔다. 특조위는 5·18 당시 출동한 군인이 1981년 작성한 ‘체험 수기’에는 “계엄군이 ‘무릎 쏴’ 자세로 집단사격을 했다”는 증언이 있지만, 1988년 군사연구소가 발간한 체험 수기에는 이런 내용이 누락된 점 등을 근거로 들었다. 특조위가 발굴한 1985년 6월5일 관계장관 대책회의 자료를 보면 당시 ‘광주사태 진상규명위원회’가 설치·운영됐다. 차관급인 국무총리실 행정조정실장이 위원장을 맡고 청와대와 ..
황석영, 이재의, 전용호가 5·18광주민주화운동 상황을 기록한 (넘어넘어)를 읽다가 눈물을 쏟았다. 는 1985년 출판되자마자 판매금지됐으나 당시 시민·학생들이 몰래 복사해서 돌려 읽던 ‘지하의 베스트셀러’였다. 얼마 전 개정판이 나온 것은 보수정권이 들어서면서 다시 역사를 과거로 되돌리려는 움직임 때문이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서 학교를 다녔다. 중학교 3학년이었다. 당시 중학생과 고등학생들까지 계엄군에 희생당했다. 그런 역사의 현장에서 나는 그냥 철딱서니 없이 구경만 하는 학생이었다. 이후 역사의 공간에 있던 5·18이 다시 ‘현재’로 소환될 때마다 부끄러움을 느꼈다. 죄책감이다. 부끄러움으로부터 도망쳐 오랫동안 복음주의 기독교에 심취하기도 했다. 부끄러움에는 두 가지가 있다. 수치심과 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