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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6학년 때 불심검문을 당한 적이 있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가는 길이었는데 경찰관이 붙잡아 세웠다. “어디 가니? 책가방 좀 열어봐.” 불쾌했으나 두려움이 불쾌함을 압도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고약한 장난이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그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옆 동네에 전두환이 살았기 때문이었다.

‘옆’까지의 거리는 꽤 됐지만, 대학생들의 시위(그땐 데모라고 했다) 소식이 들려오면 우리 동네까지 분위기가 달라졌다. 무전기를 든 경찰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대통령이 근처에 사니 치안걱정 안 해도 돼 좋다는 소리도, 얼굴 한 번 보지도 못한 대통령 때문에 평범한 사람들이 불편해진다는 소리도 들렸다. 전두환이 사는 곳은 어디쯤인지도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멀고 아득한 느낌이어서 어릴 적 그의 이미지는 마치 전래동화에 나오는 상상 속의 괴물 같았다. 한 번도 얼굴을 본 사람은 없지만, 마을 사람들이 때맞춰 어린아이나 곡식을 바치지 않으면 마을에 재앙을 내린다는 전설 속의 괴물.

10년쯤 뒤에 연희동의 한 밥집에서 우연히 ‘괴물’의 꼬리를 목격했다. 내가 가려던 곳의 옆 식당이 부산스러워 보였다. 전두환 일행이 왔다고 했다. 한우먹기캠페인을 돕기 위한 행보라고 입구에 있던 누군가가 친절히 설명해줬다. 그제서야 방금 슬쩍 보인 흰색 정장을 입은 뒷모습이 전두환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식당 안에서도 사람들은 전두환 얘기를 하고 있었다. “실제로 보니 피부가 번쩍번쩍하네” “이 동네 오래 사니까 대통령도 보네”라는 어쩐지 기분 좋아보이는 반응과, “도둑놈, 살인자가 어딜 돌아다녀” “동네의 수치”라는 말도 들렸다. 그날 밥은 맛이 없었다. 식당 탓은 아니었다.

알고 싶지 않은 그의 근황은 여전히 불쑥불쑥 일상을 파고든다. 전 재산이 29만원이라던 그는 2013년 검찰의 대대적인 추징금환수작전 이후에도 연희동 대저택에서 생활하고 있고, 2017년에는 무려 3권 분량의 <전두환 회고록>을 출간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헬기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고(故) 조비오 신부를 회고록에서 “가면 쓴 사탄” “거짓말쟁이”라고 묘사해 2018년 사자명예훼손혐의로 기소된 그는 5년 넘게 기억상실증과 알츠하이머병을 앓아왔다고 주장했다. 2019년에는 치매환자라는 그가 대설주의보가 내린 강원 홍천에서 골프를 치고 심지어 스코어를 암산해 캐디의 수고를 덜어줬다는 소식이 들렸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9년1월18일 (출처:경향신문DB)

왜 저렇게 살까. 아흔 살이 다 된 저 노인은 어째서 부끄러움을 모를까. 정당해산을 치적으로 내세우며 자유한국당 대표를 하겠다고 나선 박근혜 정부의 전 국무총리와 5·18민주화운동에 북한군이 개입됐다는 주장이 전개된 공청회를 연 국회의원들을 보며 의문이 풀렸다. 전두환은 외롭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 곳곳엔 여전히 ‘전두환들’이 살고 있고 영향력 있는 자리에 있으며 일부는 그들의 주장과 선동에 끌려다닌다. 혼자가 아닌 전두환은 부끄럽지 않은 척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부끄러움을 모른다.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법정에서 고통받은 것은 아이히만이 아니라 너무나 평범하고 차분한 그를 목격한 한나 아렌트(1906~1975·철학자)였던 것처럼.

광주지법 형사8단독 김호석 판사는 3월11일 열리는 고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명예훼손 재판에 피고인 전두환에 대한 강제구인장을 발부했다. 그가 제발로 나올지, 끌려나올지 혹은 ‘치매암산골프’를 능가하는 어떤 기발한 이유로 법정행을 피할지는 알 수 없다.

전두환의 비자금을 추적한 <아직 살아있는 자, 전두환(2013년, 고나무 지음)>이란 책이 나왔을 때 ‘아직’이라는 표현에 더 눈길이 갔다. 조금은 가혹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최근 다시 꺼내 본 그 책에선 ‘살아있는’이라는 부분을 더 오래 바라보게 됐다. 전두환은 지금 살아있는가. 저런 삶도 삶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가. 오래전 이웃의 한 사람으로 그에게 이른 조의(弔意)를 표한다.

<장은교 토요판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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