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당신의 서른여섯 번째 기일입니다. 당신이 불귀의 객이 된 것을 알게 된 어느 가을 이른 아침에 제가 슬펐다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사실은 기쁘고 후련했습니다. 만일 제가 당신의 죽음을 슬퍼했다면, 그것은 당신이 부당하게 죽이고 가두고 다치게 한 많은 이들에게 죄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쁨 안에는 한 움큼의 불안이 아로새겨져 있었습니다. 그 불안은 북한이 남침한다거나 하는 그런 허황한 상상이 낳은 불안이 아니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미군이 대한민국 땅에 버티고 있는데, 북한이 이성을 잃지 않는 한 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지요. 다만, 당신이 시민불복종에 무릎 꿇고 권좌에서 물러난 것이 아니라, 일종의 궁정쿠데타 시도에 의해 귀천(歸天)한 것이 꺼림칙했습니다. 물론 그 어설픈 시도의 주도자는..
미국의 소설가이자 비평가 윌리엄 개스는 선생님의 작품세계를 두고 “소외, 부조리, 권태, 공허, 퇴폐, 역사의 포악성, 변화의 비속함, 고통으로서의 의식, 질병으로서의 이성이라는 근대적 주제들에 대한 철학적 로맨스”라고 불렀습니다. 이 멋진 수사를 줄여 말하면, 선생님이 염세주의자라는 뜻일 겁니다. 기실 선생님의 도저한 염세주의(때때로 모순을 드러내면서도 결국은 회의주의를 거쳐서 허무주의에 이르고야 마는 그 염세주의)는 선생님의 글 곳곳에서 읽힙니다. 선생님은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골칫거리의 시작이었고 그래서 늘 절망의 꼭대기에서 살았다고 털어놓으셨습니다. 20대의 선생님이 염세주의에 허우적대는 걸 보신 선생님의 어머니가 “네가 이렇게 불행해할 줄 알았다면 너를 낙태했을 텐데”라고 말씀하셨다는 일..
뵌 지 꽤 됐습니다. 그간 제가 술 마시기를 게을리한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따루주막엘 못 갔습니다. 딴지일보에서 일하는 젊은 친구로부터 따루씨가 김어준씨와 팟캐스트를 함께하신다는 얘기를 최근에 들었습니다. 인터넷에서 따루씨를 검색해 보니 그간 활동이 대단하셨더군요. 방송출연과 집필, 특히 수많은 번역! 제가 절필하고 나서 세 해를 놀고먹는 동안에도 따루씨는 그렇게 열심히 사신 걸 알고 놀랐습니다. 따루씨를 따루주막의 ‘파트타임 주모(!)’로만 알고 있었으니, 제가 세상 소식에 이만저만 어두운 게 아니었습니다. 따루주막을 운영하는 것은 부업이고, 글쓰기와 방송 출연이 본업임을 알겠습니다. 이제는 대한민국 클럽에 가입하셔도 될 듯합니다. 에 출연하실 때도 이미 대한민국의 셀럽이었지만요. 벌써 오래전에 논..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나는 모릅니다. 러시아 어딘가에 있으리라 짐작은 합니다. 러시아 당국은 물론이고, 당신을 반역죄나 간첩죄로 기소하려 작심하고 있는 미국 정부도 당신이 어디 있는지 잘 알 것입니다. 당신이 비판한 미국 국가안보국(NSA)과 다섯 개의 눈(Five Eyes)이 당신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을 감시하고 있을 테니까요. 미국 정부는 당신의 소재를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문명국으로서의 이미지, 러시아와의 관계 따위 때문에 당신을 그냥 놓아두고 있을 뿐입니다. 지지난해에 당신이 NSA와 Five Eyes의 전 세계 민간인 사찰을 폭로했을 때, 당신 나라 정부의 부도덕함을 폭로하고 홍콩으로 피신했을 때, 그리고 마침내 러시아에 망명했을 때, 내게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당신의 나이였..
꼭 한 해 전 오늘, 당신은 유엔 여성 친선대사의 자격으로 뉴욕의 유엔본부에서 감동적 연설을 함으로써 페미니즘 역사의 한 획을 그었습니다. 당신의 그 연설은 HeForShe 캠페인의 시작을 알리며 인류의 반을, 당신과 다른 성을 지닌 이들을 페미니즘 운동의 활동가로 불러냈습니다. HeForShe 캠페인의 주체는 물론 ‘유엔 성평등과 여성권한 기구(UN Woman)’지만, 이 캠페인의 가장 상징적인 인물은 또렷이 당신입니다. 당신은 그 연설을 통해 영화 시리즈의 허마이어니 진 그레인저에서 여성운동가 에마 왓슨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젊은 당신에게 남은 영화인으로서의 인생은 길겠지만, 그 긴 생애를 당신은 또한 여성운동가로서 살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그 멋진 연설에서 남성을 페미니즘 운동가로 초대했고, 버..
무슨 말로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이 편지는 아저씨가 평생 써본 편지 가운데 가장 힘들고 슬픈 편지가 될 것 같아. 이 세상에서 결코 이 편지를 읽을 수 없는 너를 불러내는 것이 과연 옳은지 고민도 했단다. 너와 네 형, 그리고 엄마에 대해 무슨 말을 한다는 것이 도리가 아닌 것 같았어. 그러나 한편으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도 도리가 아닌 것 같았단다. 결국 마음이 뒤쪽으로 기울어져, 용기를 내 네게 이 편지를 쓴다. 세상의 모든 어른들을 대신해서. 죽음을 비롯한 끔찍한 비극을 통해서만 세상에 이름을 알리는 이들이 있단다. 그것도 범상한 죽음이 아니라 참혹한 죽음을 통해서만. 세 살배기 꼬마 아일란 쿠르디! 너도 그런 불행한 사람이 되었구나. 다섯 살배기 네 형 갈립과 사랑하는 엄마 레한과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