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를 쓰기로 마음 정하기까지 많이 망설였습니다. 이 연재를 시작하기 전에, 국내 정치에는 간여하지 않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박정희 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에게 이미 편지를 쓴 것이 그 자체로 국내 정치에 개입한 셈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무엇보다도 제가 최근 읽은 (김욱 지음, 개마고원 펴냄)이라는 책이 인상 깊어서 당신을 수신자로 불러냈습니다. 은, ‘호남 없는 개혁에 대하여’라는 부제가 드러내듯, 영남패권주의를 정교하게 분석한 책입니다. 이 책은 한 챕터를 지난해 광주 보선 때 당신이 치켜든 ‘호남정치’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당신도 짐작하시겠지만, 이 책의 저자는 당신에게 우호적입니다. 그러나 우호적이라는 것이 절대적 지지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자는 당신의 발언들에 기대어 ‘호남정..
당신의 당선이 확정된 2012년 12월19일 밤은 제게 악몽이었습니다. 저는 명륜동의 한 주점에서 이튿날 아침까지 술을 마셨고, 만취한 상태로 집에 돌아와 거실 바닥에 몸을 내던졌습니다. 깨어보니 땅거미가 내려앉았더군요. 제 처 말로는 몇 번이나 깨워 안방으로 들여보내려 했지만 제가 응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일어나서도 당신의 당선이 말 그대로 꿈이길 바랐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대통령 당선인이 되었습니다. 저는 정녕 당신의 낙선을 바랐습니다. 제가 자연인 박근혜에게 무슨 미움 같은 게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당신이 민주주의적 절차에 따라 대통령이 될 경우, 한국 민주주의의 파괴자였던 당신 아버님이 역사적으로 복권되리라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당신의 민주주의적 집권이 당신 아버님의 역사적 복권으로 ..
여든아홉 번째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6년 전 작고하신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선생님도 백수를 넘기셨는데, 선생님도 그러시기를 빕니다. 지적 거장들의 장수는 동시대인들에게 복입니다. 특히 선생님처럼 나이와 더불어 열정이 사그라들지 않는 분의 경우엔 더욱 그렇습니다. 그리고 지난달 14일 서울에서 열린 민중총궐기 대회 때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사경을 헤매고 계신 백남기 선생님께 보내주신 위로와 서울 시민들에게 보내주신 연대의 메시지에 한국인으로서 감사드립니다. 한 세대 전에 돌아가신 장 폴 사르트르 선생님은 ‘지식인’을 “자기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에 참견하는 사람” “자신의 지적 영역에서 쌓은 명성을 ‘남용’하여 기존 사회와 정치권력을 비판하는 사람”이라 정의했습니다. 물론 이 맥락에서 ‘남용’이라..
스승이 있는 친구들이 저는 늘 부러웠습니다. 지지난달 ‘읽다 그리고 쓰다’라는 주제로 서울 장충동 현대문학관에서 열린 김윤식 선생님의 저서 특별전 첫날에 모인 제 또래 친구들도 저는 부러웠습니다. 그들에게는 김윤식이라는 큰 스승이 있습니다. 스승이 있다는 것은, 그 스승이 살아계시든 돌아가셨든, 마음을 기댈 커다란 나무가 있다는 뜻입니다. 제게는 그 나무가 없습니다. 그것은 제 교만함 탓이기도 하고, 평탄치 않았던 학창시절 탓이기도 합니다. 제 학창생활은 끊어졌다 이어지기를 되풀이했고, 전학이 잦았습니다. 대학 학부에서의 전공과 대학원에서의 전공이 다르기도 했습니다. 꼭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더라도, 초등학교부터 대학원 석사과정에 다닐 때까지 제가 스친 수많은 교사들 가운데, 맘 편히 기댈 스승이 제겐 없..
아카데미 프랑세즈가 이 낱말을 프랑스어로 받아줄지 모르겠지만, 저는 오래도록 뤼테토필(lutetophile)을 자임했습니다. 뤼테토필은 ‘파리애호가’라는 뜻으로 제가 만들어본 말입니다. 파리 센 강의 시테 섬과 그 둘레의 고대 취락공간을 일컬었던 루테티아(Lutetia)에 ‘애호가’라는 뜻의 접미사 ‘필’을 덧붙인 거지요. 라틴어 이름 루테티아의 프랑스어 형태 ‘뤼테스’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파리의 이명(異名)으로도 쓰입니다. 생미셸 대로(大路)에 자리잡은 ‘뤼테스’라는 카페-레스토랑에 가본 분도 많으실 겁니다. 1992년 가을부터 1998년 봄까지 저는 여러분의 도시에 살았습니다. 저널리즘 연수를 받으러 파리에 갔다가 그 생기에 반해서 가족과 함께 그냥 눌러앉아 버린 겁니다. 1997년 말 한국에 외환..
꼭 40년 전 11월이 생각납니다. 그 시절엔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이라 부르지 않고 대학입학 예비고사(예비고사)라 불렀습니다. 대학입학 본고사 제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비고사를 속어로는 그 첫음절의 로마글자를 따 ‘Y고사’라고도 불렀지요. 예비고사 성적이 대학입학에 끼치는 영향은 일부 대학을 제외하고는 아예 없거나 매우 작았습니다. 그래도 예비고사를 치르고 나니, 한 고비는 넘겼다 싶어 마음 한구석이 조금 후련했습니다. 여러분들 대부분은 1975년 11월의 나처럼 어떤 후련함을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불안이 짙게 뒤섞여 있을 후련함을요. 대학입학 여부가 확실히 가려질 때까지 그 불안은 꼬리를 물고 이어질 것입니다. 서양처럼 학년도가 가을에 시작해서 대학입학 여부가 늦은 봄이나 여름에 결정된다면 더 ..
미라보 다리는 파리 센 강의 수많은 다리 가운데 별나게 매력적인 다리가 아닙니다. 알렉산드르3세 다리처럼 화사하지도 않고, 새 다리(新橋, 퐁뇌프)처럼 젊은이들이 밀어를 나눌 움푹 파인 공간들이 있는 것도 아니며, 생미셀 다리처럼 파리의 멋진 스카이라인을 한눈에 보여주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내가 처음 파리에 간 1992년 가을에 굳이 그 다리를 찾은 것은 순전히 당신의 그 유명한 시 ‘미라보 다리’ 때문이었습니다. 막상 가서 보고는 실망했습니다. 다리의 북쪽 끝에 당신의 ‘미라보 다리’ 첫 연이 새겨져 있는 것 말고는 아무런 특징이 없는, 볼품없는 다리였습니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이 흐른다/ 우리 사랑을 나는 다시/ 되새겨야만 하는가/ 기쁨은 언제나 슬픔 뒤에 왔었지.” 미라보 다리는 오직 당신의..
역사학자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1848년과 1968년을 세계혁명의 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인류역사를 통해 오로지 그 두 해만이 세계혁명의 해라고 못 박았지요. 그가 이렇게 썼을 때, 나는 이 저명한 역사학자에게서 투명한 지성 대신에 지적 나태와 과장된 상상력, 깜찍한 스토리텔링 재능밖에 읽지 못했습니다. 만일 실패한 혁명, 유산한 혁명, 혁명의 시도 따위를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 해들을 혁명의 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요. 기실 월러스틴도 그 두 ‘세계혁명’이 다 실패했음을 인정했습니다. 그렇지만 둘 다 세계를 뒤흔들어놓았다고 강변했지요. 그러나 언어를 엄밀하게 쓰기로 작정한 뒤, 월러스틴의 그 발언을 따져봅시다. 1848년의 실패한 혁명들은 모두 유럽에서 시도되었습니다. 미국인 월러스틴은 유럽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