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봉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국민’학교 2학년 때였던가, 어머니는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종이뭉치를 받아와 집에서 봉투를 접었다. 종이를 재단하고 밀가루 풀을 쑤어 봉투를 만들면, 이것으로 싸전에선 쌀을 담고, 구멍가게에선 과일을 담았다. 요즘이라면 인형에 눈알을 박거나 구슬을 꿰는 일처럼 장당 얼마씩 수공을 받았다. 동네 아이들은 학교를 파하면 우리 집 마루에 앉아 옥수수 얻어먹을 요량으로 봉투를 붙이고, 여름에도 군불을 지피고 방바닥에 봉투를 깔아 말렸다. 풀이 잘 마른 봉투의 수량을 세어 100장씩 끈으로 묶는 일은 내 몫이었다. 어느 날 학교에서 ‘유신헌법’ 홍보물을 주었다. 십년 후에는 ‘100억불 수출, 1000불 소득’과 더불어 마이카 시대가 열린다는 복음을 알리는 리플렛인데, 문화..
강광석 | 전농 강진군농민회 정책실장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합니다. 변하지 않는 진리는 모든 것은 변한다는 진리뿐이라 배웠습니다. 신념을 지키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킨다는 건 중심을 갈무리하고 의지의 곁가지를 실천의 힘으로 키워나간다는 걸 의미합니다. 신념의 강자는 주변의 환경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고 황소처럼 뚜벅뚜벅 천리를 갑니다. 신념의 강자는 신념을 키우는 강자입니다. 사색과 공부를 늦추는 법이 없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충고를 겉귀로 듣지 않습니다. 사람들 대하는 데 진지하고 실천에서는 물러서지 않으며 학습목표에 철저한 사람은 어지간한 바람에 흔들림이 없습니다. 옳고 정당한 일을 한다는 자기긍정과 헌신과 실천으로 세상을 떠밀고 간다는 자긍심이 없으면 가족들의 고생과 생활능력이 없다는 주변의 ..
함민복 시인 야구를 하다가 코와 눈을 심하게 다쳤다. 윤동주문학상 시상식에 작년도 수상자로 참가했었다. 행사장은 인왕산에 자리 잡은 윤동주언덕이었다. 윤동주를 사랑하는 일본사람 10여명을 비롯하여 꽤 많은 문인들이 참가했다. 행사 중에는 전년도 수상자가 금년도 수상자에게 선물을 주는 순서도 있었다. 나는 연필 모양의 젓가락을 선물로 준비했다. 시인의 영혼의 젓가락은 연필 아닌가, 하는 발상이 떠올라서였다. 행사가 끝나고 뒤풀이가 이어졌다. 반가운 사람들이 많았다. 자리를 옮기며 술자리가 길어졌다. 마지막 술자리 끝에 깜박 잠이 들었다 깨어나 보니 새벽이었다. 택시를 타고 오던 중 김포에서 글을 쓰고 있는 후배 작업실이 생각났고 그 후배의 작업실로 갔다. 작업실에는 그 후배와 다른 후배가 있었다. 그들은 ..
이갑수 | 궁리출판 대표 곱고 고운 하늘이라지만 마냥 인자한 것만은 아니다. 따뜻한 햇빛을 무량하게 보내주지만 천둥과 날벼락을 숨겨두기도 한다. 요즘 날씨는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지지난달 강원, 경북 일부 지역에는 느닷없이 동전만한 우박이 농작물을 급습해 농민들의 가슴팍을 후려치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심한 가뭄이다. 한편 올여름엔 우기가 아주 길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하늘에서는 시시각각 많은 일들이 벌어진다. 최근 한반도 하늘에서 발생한 가장 주목할 만한 사건을 시간 역순으로 네 가지만 꼽아본다. 2012년 6월6일. 금성이 태양면을 지나가는 금성일식이 펼쳐졌다. 태양과 금성, 지구가 일직선상에 놓이면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금성일식은 이날 오전 7시9분38초부터 시작돼 오후 1시49분35초까지..
강석진 | 순교복자수도회 신부 kangsj319@hanmail.net 6월의 어느 더운 날 저녁, 책상 앞에 앉아 진땀을 빼며 이것저것 일을 하면서도, 유난히 맥주가 생각났습니다. ‘아, 오늘 같은 날, 누가 맥주 한잔 먹자 하면 좋겠는데….’ 그런데 이런 나의 바람을 알기나 한 것일까, 내가 사는 수도원 근처에 있는 교구 동창 신부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야, 뭐하냐! 맥주나 한잔하자. 빨리 나와….” 순간, ‘와,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혼자 히죽 웃으며 약속 시간과 장소를 정한 후 주섬주섬 차려입고 대문을 나서 맥줏집으로 갔습니다. 그날따라 약속한 맥줏집은 사람이 왜 그리 많은지, 평소보다 많은 손님들이 맥주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먼저 도착한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동창 신부님도 어느..
강광석 | 전농 강진군정책실장 늦은 시간, 자신은 부정하지만 약간 술기운이 있는 목소리로 안부를 전한 후배 녀석은 국어 선생님입니다. “형, 시 한번 들어보세요. 윤도현 것인데요….” 전화 건너편 한 인간의 언어가 귓속을 지나 인중을 타고 들숨 날숨과 섞이더니 이내 가슴에 무거운 돌로 박혔습니다.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 “더도 말고 덜도 말..
함민복 | 시인 찔레꽃 필 때는 비가 오지 않는다고 하더니, 정말 비가 오지 않았다. 기상청 예보로는 전국적으로 소나기가 온다고 했는데 날씨만 좋았다. 요즘은 날씨가 너무 좋아 탈이다. 일주일 전, 동네 형 차를 탔다. 동네 형은 논에 물을 대려고 100m짜리 비닐호스 다섯 타래를 샀다. 들판 길을 달리며 저수지에 물이 말라들어가 걱정이라고 했다. 물을 미리 받아놓은 아랫다랑논에서 윗다랑논까지 물 호스 까는 작업을 해야 한다고 했다. 먼저 펌프를 설치하고 작동시켜 보았다. 펌프 출구에 호스를 끼우고 타이어 쪼갠 고무줄로 친친 감아 묶었다. 동네 형은 말라붙은 물도랑으로 호스가 꼬이지 않게 조심조심 펼쳐 나갔다. 한 타래를 다 펼쳐 놓고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왔다. 자신은 호스에 물이 차 나가는 것을 보며 ..
이갑수|궁리출판 대표 나이가 오십에 진입하면서, 해묵은 숙제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런 와중에 일 하나를 저지르고 말았다. 철이 완전히 들었다면 그런 짓을 아니했을 터인데, 철이 들려다 만 모양이다. 일 년 동안 사무실 근처의 인왕산을 관찰하면서 내 고민의 일단을 드러내는 어설픈 책 한 권을 낸 것이다. 그 책에 그 숙제도 수록됐다. 란 제목의 짧은 글은 다음과 같았다. “나는 인왕산을 보고 인왕은 나를 본다. 그러니 나는 나를 못 본다. 인왕도 나처럼 그럴까. 인왕의 그 사정을 나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나를 볼 수가 없다. 이는 틀림없는 객관적 사실이다. 이 말이 굉장히 중요해서 진종일 염두에 둔다면 어쩌면 한 소식 들을 수도 있을 것만 같다. 그런데 그만 금방 잊어버린다. 아무리 노력해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