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수 | 궁리출판 대표 몸에 좋다는 것을 먹어야 하는데 내가 좋아하는 것을 가까이 하다 보니 결국은 이상신호가 왔다. 종합검진을 받기로 했다. 몸에 달린 각 기관별로 작은 방을 돌라고 했다. 세 번째는 복부검사를 하는 곳이었다. 진료침대에 만세하는 자세로 누워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팽창하는 갈비뼈와 불룩해지는 배. 눈을 내리깔고 무덤처럼 부푼 배꼽 주위를 보는데 문득 떠오르는 책과 영화가 있었다. 란 책이 있다. 노름마치란 ‘놀다’의 놀음(노름)과 ‘마치다’의 마침(마치)이 결합된 말로 최고의 명인을 뜻하는 남사당패의 은어이다. 책에는 강호에 숨어 있던 기생, 무당, 광대, 한량을 발굴하기까지의 내력과 한껏 괄시받았던 그들의 눈물겨운 사연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머리말은 이렇게 시작한다. “1974년..
늘 안타까운 눈으로 모니터를 통해서만 바라보는 땅이 있다. 제주 강정. 천주교 제주교구장인 강우일 주교는 “이 작은 고을에서 평화가 시작될 것”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평화의 왕자라는 예수조차도 빵 굽는 동네 베들레헴에서, 그것도 마구간에서 태어났으며, 성경에서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던 나자렛이란 촌읍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강정에 가 보면 몇몇 천주교 사제들이 공사장 입구를 지키면서 매일같이 미사를 봉헌하지만, 미사에 참석하는 이들은 양손가락으로 헤아려도 충분할 만큼 적은 숫자다. 그러니 경찰들이 밀어붙이고 조롱하기 일쑤다. 심지어 문정현 신부가 들고 가던 성체마저 경찰에 밀려 땅바닥에 뒹굴었다. ‘국가안보’와 관련된 일이라니, 정부와 경찰의 태도에서 공손함을 찾아보기 힘들다. 때때로 뭍에서 강정 해..
최용혁 | 서천군농민회 교육부장 “삐약삐약” 갓 태어난 병아리 1000수를 들여온 날은 비 온 뒤 기온이 뚝 떨어진 날이었습니다. 부화장 사장님은 “보온 잘해야 해요”했지만, 과한 보온보다는 추위를 견디게 하는 편이 낫습니다. 갓 태어난 병아리가 죽는 것은 추워서가 아니라 추위를 이기기 위한 과정에서 한 곳에 몰려 압사하는 이유가 대부분입니다. 몰려서 겹치지 않도록 잠자리에 완만한 경사로를 만들어 주고 볏짚이나 왕겨 정도로만 보완하면 큰 문제는 없습니다. 오히려 추위를 견디는 과정에서 잔털이 발달하고 돌아오는 겨울에도 튼튼히 버틸 체질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어미 품만큼이야 하겠습니까만은 이 정도면 길러야 하는 사람과 커야 하는 병아리의 적절한 타협점입니다. 올겨울은 이 병아리들과 함께 지내게 ..
함민복 | 시인 해발 800m 산속에서 살고 있는 친구가 결혼을 한다고 했다. 장소는 살고 있는 집이라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나이 들어 하는 결혼이라 쓸쓸할 텐데, 산속에서 결혼을 한다고 하니 더 맘이 쓰였다. 일찍 집을 나서 서울로 가, 선배 시인 딸 결혼식에 잠깐 참석하고 원주로 향했다. 출판사를 시작한 후배 차를 타고 가며, 출판시장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와 내가 하고 있는 인삼장사 얘기를 나눴다. 얘기에 속내를 풀어놓을수록 작은 출판사나 영세 삼장사는 다 힘든 상황으로 치달았다. 길가 야산에는 벚나무 단풍이 들고 있었다. 주말인데도 차량이 많지 않아 고속도로가 뻥 뚫렸다. 시원하게 차가 빠지자 후배는 좋지 않은 경기 덕을 우리가 톡톡히 보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고속도로를 내려온 차가 원주 시내..
이갑수 | 궁리출판 대표 저 산에 언제 다 오르랴 싶지만 꼭대기로 가는 길은 언제나 좋다. 산 아래에서 아무리 찧고 까불어대도 바람과 구름만으로 천만변화를 일으키는 하늘만 상대할 수 있잖은가. 허무한 마음과 맹랑한 말들을 뒤로한 채 순한 짐승처럼 헐떡이다가 그곳에 천천히 도착하면 누구나 오직 한마디의 외침만 내지르면 된다. 마음속 가득 쌓인 먼지까지 끌어올리면서, 야호! 천관산이란 이름을 들었을 때 참 생소했다. 이상하게도 우리나라에 있는 산 이름 같지가 않았다. 그러나 내가 미처 그 이름을 몰랐을 뿐, 산은 이미 웅장한 산으로 장흥에서 장흥사람들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장흥을 지키고 있었다. 지리산, 내장산, 월출산, 변산과 더불어 전라도 5대 명산 중 하나였다. 억새가 유명해서 가을이면 전국 규모의 큰 ..
“내 가난함으로/ 세상의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배부릅니다/ 내 야윔으로/ 세상의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살이 찝니다/ 내 서러운 눈물로/ 적시는 세상의 어느 길가에서/ 새벽밥같이 하얀/ 풀꽃들이 피어납니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이 지은 ‘세상의 길가’라는 시. “어디 갔다가 늦게 집에 가는 밤이면 불빛이, 따뜻한 불빛이 검은 산 속에 깜박깜박 살아있는 집. 그 불빛 아래 앉아 수를 놓으며 앉아 있을 그 여자의 까만 머릿결과 어깨를 생각만 해도 손길이 따뜻해져오는 집”이라고 적은 ‘그 여자네 집’만큼이나 망명정부 같은 이승을 살아가면서 힘든 고비를 넘길 때마다 가슴으로 읽던 글귀다. 이건 아마도 그리움일 것이다. 이승에서 다 채우지 못할 영원한 고향 같은 다정함에 대한 갈증일 것이다. 기울어가는 세상의 무게중..
최용혁 | 서천군농민회 교육부장 “어느 해든 농사가 그냥 되는 법이 있나!” 석 달 가뭄에 호미로 땅을 파서 모를 심고 돌밭을 일구어 옥답을 만들던 옛날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올 같은 바람은 살다살다 처음이네.” “무슨 놈의 비가 오기만 하면 퍼붓는가 몰라” 하며 하늘을 원망하는 일은 해마다 더해 갑니다. 이변이 일상이 되어가면서 단 한번의 집중호우 또는 단 한번의 태풍으로 한 해 또는 몇 해의 노력이 물거품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냥 되는 법’이 없는 농사 이야기는 콩을 심어 콩을 얻는, 말하자면 행동에 따른 정직한 결과가 되기보다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기’까지의 난관과 극복에 관한 것입니다. 특히 자연재해로 ‘○○ 심은 데 ○○ 난다’가 어렵게 되거나 ‘△△ 심었는데 이럴 수가..
함민복 | 시인 오랜만에 들판을 보려고 집을 나섰다. 하늘은 높푸르고 세상은 평화롭다. 세상의 수직한 것들이 수평을 절감해 보았던 태풍. 먼 바다 큰 바다에서 태풍은 왔다. 땅속의 뿌리들에게 지상의 몸들을 치열하게 읽어보라고, 태양조명 끄고 사선으로 내리치는 빗줄기를 흩뿌리며 태풍은 왔다. 수직한 것들의 근심을 일제히 뿜어 올려주던 태풍. 아, 그 끝도 없이 불어오던 바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TV 전파가 자연을 생중계하게 만들던 어마어마한 바람들은 홀연 다 어디로 사라졌는가. 가을 들판은 고요하다. 바람소리가 모든 소리들을 다 이끌고 간 듯 들판의 공기는 한가롭다. 걷던 길을 멈춘다. 길가의 들풀들은 별일 없었던 듯 건재하다. 연이은 태풍에 5000여개의 전신주가 부러져나갔다고 하는데, 어떻게 저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