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수 | 궁리출판 대표 벌초하러 가기 위해 배낭을 꾸리는데 KBS 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청정 거창, 마음으로 걷다’ 편이 흘러나왔다. 수승대, 고택, 거창사과는 물론 야치기해서 잡은 물고기로 어탕국수를 끓여먹는 것까지를 모두 보느라 출발 시간을 조금 늦추어야 했다. 고향까지 쭉 뻗은 길. 그 길을 신나게 달리면서 45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떠났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내 인생에서 참으로 다행스럽게 여기는 것이 있다. 그것은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부산으로 전학가기 전까지의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냈다는 사실이다. 날이 갈수록 나는 이 체험이 사무치게 좋아진다. 나의 고향은 거창읍에서 덕유산 자락으로 사십여리(里). 내 어머니 머리에 쌀 이고 장에 갈 때 두 시간 남짓 걸리는 깡촌이었다. 그렇게 나를 길러..
작년인가, 초등학생 딸아이가 가정통신문을 들고 왔다. 자녀들을 일찍 등교시키지 말라는 통보였다. 학교 안에서 납치유인돼 성폭행을 당한 아동이 늘어나면서였다. 그후 서울시교육청에서 학교 보안관 제도를 마련해 그나마 안심이 됐는데, 최근 연이어 아동성폭력 문제가 이슈가 되면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동네 구석구석이 우범지대로 보이고, 나이 불문하고 ‘잠재적 위험분자’로 보여 딸의 안전을 골몰하게 만든다. 요즘은 딸을 키우는 부모에게 ‘난세’인 듯하다. 최근에 개봉된 김휘 감독의 이라는 영화를 나는 보지 않는다. ‘동정 없는 세상’에서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 게 뻔하기 때문이다. 영화 포스터는 “죽은 소녀도, 살인마도, 그를 막는 사람들도 모두 ‘이웃사람’이다. 202호 소녀의 죽음, 그리고 열흘 간격으로 발..
각시도 예전의 각시가 아닙니다. 마을 도서관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각시에게는 나와 두 딸 말고도 매일 만나야 할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마을 도서관에 부여하는 의미와 가치만큼 각시의 일이 많아졌고 그만큼 혼자 밥 먹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외롭다’고 보내는 신호가 무시되기 일쑤이며 ‘힘들다’는 투정도 가급적 스스로 해결해야 합니다. 내 유전자로부터 기대하는 각시와 거리가 멀어져 갑니다. 부모님을 보며 몸으로 배워 온 전통적인 부부관계의 틀로 사고할 때는 가정의 평화와 행복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습니다. 돈이 없기도 하지만, 적금이나 연금 따위로 미래를 스케치할 상황이 아닙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인생의 전략으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잘 안되긴 합니다만, 자세를 낮추고 물어보는 것이 가장 빠른 줄..
함민복|시인 강화도에는 화가들이 300여명 산다. 서울이나 인천 같은 대도시로의 접근성이 용이하고 자연이나 역사적 배경 같은 작업환경이 좋아서 그런 것 같다. 섬 주민 200여명 중 한 명이 화가인 셈이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화가들의 작업실을 방문할 때가 많다. 내가 아는 화가들의 작업실은 대부분 열악하다. 농부들이 가축을 기르던 건물이나 폐가를 손봐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작업실은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춥다. 단열이 잘되지 않아 열손실이 많기 때문에, 전기나 기름 같은 값비싼 연료는 잘 사용하지 않는다. 한겨울 연탄가스가 스며나오는 작업실 문을 열 때면 나쁜 생각이 먼저 떠올라 겁이 나기도 한다. “글 쓰는 사람들은 좋겠어요. 공간도 많이 필요 없고 들어가는 재료도 별로 없고, 뭐 종이 하고 연필이나 컴..
이갑수 | 궁리출판 대표 몸 중에서 가장 부드러운 부분이 어디일까. 주먹 쥐면 묏잔등처럼 불룩 솟아나는 손등일까. 그곳의 솜털은 잔디처럼 송송하니 부드럽긴 부드럽겠다. 의자와 접촉하여 말랑말랑해진 엉덩이일까. 노을빛이 훑고가는 목덜미일까. 앵두 같은 입술도 그 누군가에게는 벙그는 꽃잎처럼 참 부드럽겠다. 첫사랑 떠올리면 슬쩍 붉어지는 볼우물은 그 아니 부드러울까. 최근에 알았다. 내 몸에서 또 하나 부드러운 부위를. 일상생활에서 그곳은 늘 숨어 있었다. 그래서 내 몸이었지만 이토록 늦게 발견된 모양이다. 어느 토요일 아침. 간밤의 숙취에서 괴롭게 눈을 떴다. 부글거리는 배가 몹시 소란스러웠다. 윗몸을 일으켜 다리는 벌리고 발을 모은 뒤 꼬리뼈를 축으로 허리를 바짝 접었다. 자동으로 양 발바닥의 오목한 부..
강광석 | 전농강진군정책실장 ‘낮은 목소리’와 인연을 맺은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시골 강진에서 서울의 유력 중앙지에 글을 쓴다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요, 마을사에 남을 화젯거리였습니다. 땅 파먹고 사는 농민의 글에 대해 ‘어쭈 제법 쓰네’ 칭찬을 받기도 했고 같이 운동하는 활동가들 사이에선 ‘어째 글이 밋밋하고 힘알탱이가 없다’는 비판을 듣기도 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글을 썼고 다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얼추 70차례가 넘는 것 같습니다. 중간에 몇몇 출판사에서 책으로 엮어보자는 과분한 제안을 받았고 저 같은 사람의 글이 경향에 실리기에 경향이 ‘경향스럽다’는 편지를 여러 편 받았습니다.고향이 남쪽인 외지분들은 바깥 소식을 전해주셨고 사는 곳이 남쪽인 분들은 좋은 소재거리를 제안해 주셨습니..
함민복 | 소설가 대전 계족산을 다녀왔다. 계족산 황톳길은 총 14㎞다. 강화에서 서울까지 시멘트길은 고무타이어 바퀴를 타고 가고, 서울에서 대전까지 철로 된 길은 빠른 쇠바퀴를 타고 갔다. 이어 지인의 자동차를 타고 닭다리산 들목까지 가 바퀴를 벗었다. 그제야 황톳길을 만나 내 몸을 담고 다니던 신발에서 내려섰다. 바짓가랑이를 걷고 양말도 벗었다. 맨발. 흙을 밟으며 괜히 쑥스러워졌다. 집에서는 늘 맨발로 생활하면서도 별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길에서는 달랐다. 숫기 없는 사내애처럼 발이 수줍음을 타며 허공에서 멈칫거렸다. 평소와 달리, 길의 맨살을 맨살로 만나자, 발이 길을 낯설어 해서 그런 것 같았다. 또 길은 늘 맨살이었고 나만 늘 신발을 신은 채였구나, 하는 작은 깨달음 뒤에 오는 미안한 맘의 영향..
이갑수 | 궁리출판 대표 한 달 전까지만 해도 극심한 가뭄이었다. 눈이 종적을 감춘 이후 계절의 순서에 의해 봄이 오고 비가 몇 번 내렸다. 여름의 기미가 도래했지만 비다운 비가 오지 않았다. 100년 만의 가뭄이라고 했다. 특히 농민들의 인내심이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이 갈증이 지속된다면 사람들의 가슴에서는 마음의 세굴(洗掘) 현상이 일어나고 머리에서는 이성의 보(洑)가 붕괴될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그 와중에 누군가는 4대강으로 가뭄과 홍수를 극복했다고 흰소리를 늘어놓았다. 고인 강물을 찡그린 채 바라보아야 하는 흰 구름이 들었다면 기가 찰 노릇이었다. 지난달 마지막 주말을 이용해 강원, 경북 일대의 산림문화 생태답사에 참가했다. 원주 신림(神林)의 성황림, 예천의 회룡포를 둘러보고 금당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