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 나는 시골의 어느 여자 중·고교에서 ‘전임강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수업과 담임 등 업무에선 정규직 교사와 하나도 다르지 않지만 월급만은 정규직 교사의 반절 정도를 받는, 이를테면 비정규직 교사였다. 수업시수도 아주 많았는데, 더 힘든 것은 정규수업 이외 자율학습 감독이었다. 말만 ‘자율’일 뿐 모든 학생들이 자율학습비까지 강제적으로 따로 내면서, 교사와 함께 학교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내가 재직하고 있던 학교의 교장은 도내에서도 소문난 제왕적 교장이었다. 군부독재의 폭압적 권위가 하늘을 찌를 때였다. 모든 조직의 수장은 당연히 절대적 권력자로 군림했는데 학교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침조회에서 교장이 국가시책을 소홀히 하는 교사를 나무랄 때 “선생놈들이…” 하는 거친 표현을 입에 담아도 항..
아직도 스무명이 넘는 우리의 아들딸과 이웃들이 수심 40미터 캄캄한 바다 밑에 있다. “달나라에도 가는 세상인데…” 하면서, 아내가 설거지를 하다말고 내게 냅다 투가리 깨지는 소리를 한다. 가족을 책임져야 할 가장인데도 나는 유구무언이다. 어린 두 딸의 엄마가 된 딸애가 아이들을 안고 눈시울을 붉히면서 “앞으로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지켜가야 돼요!” 하고 역시 내게 볼통하게 묻는다. 아이들을 지켜야 할 아비인데도 나는 역시 유구무언이다. ‘아비’가 주역인 역사를 살아온 터, 부끄럽고 미안하지만 그 말조차 할 염치가 없다. ‘가장’이자 ‘아비’인 사람들이 가족들을 지킬 수 없다면 무엇으로 역사는 지키고 무엇으로 나라는 지키겠는가. 누구라도 그럴 것이라 믿는다. 세월호 속엔 지금 세상의 모든 아비, 모든 어..
“봄날 온 산천에/ 종환(腫患)들이 떼지어 솟아/ 터진다/ 피고름이 터진다// 무섭다” ‘꽃’이라는 제목으로 내가 쓴 시다. 봄이 일찍 도래했기 때문일까. 올봄의 꽃들은 피어나는 게 아니라 터져 나오는 것 같다. 울안의 매화 산수유가 터지더니 호숫가를 따라 벚꽃들이 줄지어 터져 나오고, 건넛마을에서 앵두 자두 복숭아 배꽃 조팝나무 살구 등이 도미노로 줄지어 소리치고 나선다. 겨울의 혹한을 견뎌내느라 미상불 속새로 고열도 나고 통증도 참았을 터이다. 그러니 결과로서의 꽃이야 애오라지 부시고 고울망정, 그 과정으로서의 어둠 속에서야 잔인하고 피어린 고투(苦鬪)가 왜 없었겠는가. 저것은 분명 금기를 깨치고 터져 나오는 못 말릴 색정이요, 천상을 건들 만한 존재의 나팔소리인 것이다. 관념이 아니다. 실제적인 빅..
교수직을 정년퇴임하던 날이었다. 밤이 깊을 때까지 나는 서재에 앉아 있었다. 창 너머 북악은 캄캄했다. 교수보다 작가가 본업인 걸 한번도 잊은 적이 없으므로 교수직의 정년은 나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 문제는 나이가 주는 자의식. 65세라니, 아주 낯선 느낌이었다. 나는 서재를 둘러보았다. 이만하면 가난한 젊은 날 꿈꾸던 서재에의 소망을 충분히 이루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아하, 나는 이미 가난하지 않구나. 난데없이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웬일인지 비탄에 가까운 중얼거림이었다. 갑자기 불안해졌다. 거실이 있고 TV, 오디오, 자동차도 있으며 평생 동안 나의 충직한 시종처럼 살아온 아내도 있었다. 아내는 앞으로도 계속 밥을 짓고 빨래를 해줄 것이었다. 부족한 것이 없었다. 아이들 셋도 결혼해 분가했으니,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