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세계지도를 들여다볼 때마다 내가 꿈꾸듯 가보고 싶었던 곳은 두 군데였다. 하나는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 하나는 시베리아 바이칼호이다. 희망봉은 그 이름 때문에, 바이칼호는 초승달 닮은 그 모양 때문에 끌렸다. 희망봉은 아프리카 최남단 케이프 반도 끝에 위치한 곶의 이름이다. 인도양과 대서양을 가르는 기점이며,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항로를 개척할 때 희망의 징후로 삼았던 지표이다. 내가 그곳에 처음 간 것은 ‘6·29 선언’ 얼마쯤 후였던 것 같다. 87년의 ‘6월 항쟁’은 정말 대단한 불길이었다. 청년학생뿐만 아니라 시민들도 거리로 쏟아져 나와 깃발을 함께 들었고 함께 행진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최루탄 연기 속에서 학생, 남녀노소 시민들과 더불어 밀려나가던 그 뜨거운 함성이 아직 생생하다. 어..
새해 첫날 논산집 거실에서 선물 받은 풍물북 한 면에 나는 이렇게 썼다. ‘從心所欲 不踰矩(종심소욕 불유구)’, 공자가 이르되 나이 칠십은 ‘마음대로 해도 법도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했다는 것이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림없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거야 쉰 살의 지천명(知天命), 예순의 이순(耳順) 경지를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한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일 뿐, 천명조차 깨닫지 못하고 늙는 대부분의 사람에겐 어림없는 꿈이 아니겠는가. 성희롱으로 재판에 부쳐진 전 국회의장님은 올해 나이 일흔일곱이다. 그래서 나는 풍물북 아래쪽에 이어서 이렇게 썼다. “이제 겨우 일흔이 되었구나!” ‘겨우’라는 낱말에 나는 방점을 찍었다. 공자는 지금 같은 고령화 사회를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나라 노인 인구비율은 201..
세계인권의 날 즈음에 공개된 미국 CIA의 고문 실태 보고서는 충격적이었다. 그들은 ‘유용한 정보를 별로 얻어내지도 못’하면서 혐의자들을 감금, 잠 안 재우기나 물고문 등 온갖 고문을 자행했다. 민주주의 선진국이라 칭송되는 미국의 국가조직이 저지른 일이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고문용어도 나왔다. 이를테면 ‘직장(直腸) 급식’ 같은 말. 항문으로 물이나 음식을 강제 주입해 조직이 찢어지거나 만성출혈, 탈장을 유도하는 고문방법이다. 고문으로 숨진 사람도 있었다. 피고문자 일부는 아무런 혐의조차 없는 민간인들이었다. 고문이 자행되던 당시의 미 대통령과 정보국 간부들은 ‘인간적인 심문방법’을 통해 ‘효과적’으로 정보를 얻고 있다면서 고문을 공식적으로 승인한 사실을 인정했다. 놀랍고 또 끔찍하다. 우리에게 이런 ..
어릴 때 살던 연무읍 들 동네의 초가는 환기구 같은 작은 창이 하나 있었는데 북향이었다. 바느질하던 어머니는 한겨울에도 곧잘 짜증스럽게 창호지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강경으로 이사한 다음에 쓰던 방 역시 햇빛은 잘 들지 않았다. 한낮에 형광등을 켜놓고 책을 읽다가 전기료를 아끼지 않는다고 아버지에게 지청구 들은 적이 많았다. 비현실적인 자의식이 자라기 좋은 방이었다. 황홀한 젊은 날의 빛을 전혀 만날 수 없었다. 그 어두운 방에서 나는 우울의 숙주를 키워 내 영혼의 심지로 삼았다. 나의 소원은 더 밝은 곳으로 가는 일이었다. 나는 자나 깨나 넓고 밝은 터로 가고 싶었다. 속 좁은 사람이 된 게 모두 어두운 방 때문인 것 같았다. 좁은 들길-신작로-포장도로-하이웨이를 따라 대도시 서울로 살림터를 옮겼다. 보..
지난 한글날 아침, 논산시 건강관리센터 마당에 500여명이 모여들었다. 아이를 데리고 나온 논산 시민들도 있었고 대전, 서울, 부산 등에서 온 독자들도 많았다. 논산의 아름다운 곳곳을 ‘작가와 독자’가 함께 걷는 행사 “소풍”의 첫날이었다. 내가 제안해 시작한 행사였다. 작년엔 5일을 함께 걸었는데 올해는 4일로 줄였다. 연두색 들은 정결하기 이를 데 없었고 계룡산 연봉들은 잡힐 듯 가까웠다. 인사말에서 나는 ‘함께 걷되 혼자 걷고 혼자 걷되 함께 걷자’고 제안했다. 반야산 솔숲을 종단해 ‘은진미륵’의 관촉사에서 미륵세상의 의미를 되새기고, 성덕리 너른 들을 지나 계백의 혼이 숨 쉬는 탑정호에 도착하자 점심시간이었다. 제공된 도시락을 먹고 나면 호숫가를 따라 나의 집필실 마당까지 내처 걸을 터였다. 산과..
A일보 입사시험 면접을 보러 가기 위해 서울역에서 시청까지 걸어가던 오래전의 어느 새벽이 떠오른다. 이십대 중반, 서슬 퍼렇던 군부독재 시절의 일이다. 정부가 주인인 신문이었지만 필기시험을 통과한 것만으로도 ‘시골청년’이었던 나는 한껏 고무돼 있었다. 밤기차로 올라와 새벽의 노점상에서 싸구려 토스트 한 조각을 사먹고 난 ‘청년’은 시청 앞까지 더듬더듬 걷는다. 섬뜩하게 추운 날씨다. “잘살아보세~”로 시작되는 새마을노래가 시청 앞 가로에 힘차게 울려 퍼지는 중이다. 최종 면접 과정만 남긴바, 순진하게도 청년은 ‘특별시’에서 말뚝 박고 ‘잘 살아볼’ 절호의 찬스를 맞았다고 상상한다. 간단하게 끝나리라 생각했던 면접은 거의 하루 종일 진행된다. 상식문답 코스, 영어면접 코스도 있다. 마지막이 사장 면접이다...
너무 극적인 사건이 일어나면 “소설 같다” 하거나, 너무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면 “소설 쓰냐” “소설 쓰고 있네!” 하던 시절이 있었던 것을 혹시 기억하시는가. 소설 속 이야기가 현실적 이야기보다 앞서가던 시대의 풍경이다. 하지만 그런 풍경은 이제 전설에 편입돼가고 있는 중이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이야기가 작가의 상상력을 통해 나오는 이야기보다 훨씬 더 독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과거의 작가들은 현실의 이야기에 독을 조금 타서 더 극적으로 그려냈다면 오늘의 작가들은 독한 현실의 이야기에 물을 타 중화시켜 쓰지 않으면 안되는 형편이 됐다고 할 수 있다. 현실을 그대로 옮겨 쓰면 당신은 틀림없이 이렇게 작가를 비난할 것이다. “에이, 아무리 소설이지만 그런 뻥이 어디 있어!” 예컨대 근래 일어난 “포..
논산집필실에서 서울 본가까지는 차가 밀리지 않을 때 승용차로 보통 2시간 조금 넘게 걸린다. 전장이 180킬로미터쯤 된다. 지난 가을엔 태안반도 천리포수목원에 갈 일이 있었는데 차가 밀리지 않았으나 그곳까지 대략 2시간30분여가 소요되었다. 같은 충남이고 거리도 더 가까운데 서울보다 오히려 더 오래 걸렸다. 몇 년 전 완공된 당진-대전간 고속도로가 없었으면 아마 4시간 이상 걸렸을 것이다. 지역 안에서도 형편은 다르지 않다. 모든 도로는 한결같이 행정소재지를 향해 뚫려 있다. 대도시와 대도시를 연결하는 고속도로가 최우선이다. 이는 내 집 앞-이웃 마을을 잇는 도로 포장사업부터 시행했다고 알려진 대만과 비교된다. 이웃마을에 가는 것보다 소재지에 가는 게 훨씬 더 빠른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게 지금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