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날 때면, 그곳 자연의 질료가 삶과 예술로 표출된 현장을 찾아가곤 한다. 파리 근교 지베르니의 모네의 집, 프랑크푸르트 마임강 근처의 괴테의 집, 쿠바 아바나 코히마르 바닷가 마을의 헤밍웨이의 집, 멕시코시티 코요아칸의 프리다 칼로의 집, 원주 치악산 기슭의 박경리의 집 등이 그들이다. 작품을 감상하듯 집의 위치, 들고나는 출입문의 구조와 인상, 지붕과 창의 형태와 크기, 빛과 그늘의 흐름 등을 음미하는데, 이들 중 내가 특별히 주목하는 곳은 부엌이다.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의 지베르니 집은 연작 ‘수련 연못’의 현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원작의 감흥을 연장하고 싶은 감상자들은 그림 속의 실제 연못과 못 위에 떠 있는 수련, 휘늘어진 버드나무의 실루엣을 그대로 느끼기 위해 지베르니..
나는 오랫동안 박물관 중독자로 살아왔다. 박물관의 실체를 인지하기 시작한 것은 20대 중반 이후, 이웃 일본의 도쿄국립박물관과 유럽의 몇몇 대형 박물관들을 순례하던 시절이다. 어느 해 벚꽃 피는 4월, 혼자 우에노공원에 있는 도쿄국립박물관에 갔다가 한국의 고대 유물들 앞에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해 뜨거운 여름, 혼자 파리의 루브르박물관에 갔다가 에게해 사모트리케섬에서 옮겨온 황금 날개 승리의 여신 니케 조각상에 사로잡혔다. 그날 이후, 바람난 여자처럼 틈만 나면 가방을 꾸려 떠났다. 특히 어느 해 우중충한 여름, 베를린의 페르가몬박물관에 갔다가 터키 페르가몬에서 옮겨온 목 없는 여인상들을 맞닥뜨렸을 때에는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하는 존재들의 안타까움과 연민이 비좁은 가슴팍을 타고 북받쳐 올라와 ..
편지는 발트해 연안의 칼리닌그라드에서 왔다. 발신자는 하랑. 얼마 전 아연(아르굴)과 함께 모스크바국립대에서 만난 1학년 여학생이다. 하랑은 한국명이고, 러시아 본명은 알리사 체칼리나. 나는 하랑의 안내로 노보데비치 수도원 묘지에 갔다. 그곳에 체호프와 고골이 묻혀 있었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하랑과 나는 걷거나 전철을 타고 모스크바 시내를 이동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이 러시아 소녀는 방학을 맞아 며칠 뒤 친척집이 있는 지방 도시로 떠난다고 했다. 처음 들어보는 낯선 곳이었다. 하랑은 호박(琥珀) 산지로 유명한 곳이라고 덧붙였다. 아르바트 거리나 붉은광장 앞 백화점 진열대에서 보았던 다양한 모양의 황금빛 보석이 떠올랐다. 7월 모스크바의 태양은 정수리를 쪼아대듯 뜨거웠고, 나는 하랑이 간다는 도시 이..
종은 4시에 울리기로 되어 있었다. 마을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이방인들이 모여들었다. 모두 하늘을 올려다보는 자세로 창공의 종탑과 종루로 시선을 고정시킨 채 첫 타종을 기다리며 숨을 죽였다. 세 개의 아치형 종루와 종탑에 크고 작은 종들이 매달려 있었다. 나는 예종이 울리기 전부터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곳이 어디든 들려오는 종소리에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귀를 내주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나는 유독 종소리에 얽힌 추억을 많이 간직하고 있었다. 나에게 추억이란 낯선 곳에서 겪은 일들과 소설이나 영화, 또는 그림 속에서 만난 장면이 포함되었다. 해질녘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어 들었던 범종각의 종소리,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에서 런던 사람들에게 시간 감각을 일깨워주던 빅 벤의 종소리, 그리고..
모스크바강에서 바라본 세상은 붉은 노을 천지였다. 강으로 나를 이끈 것은 아르굴이었다. 아르굴을 만난 것은 크렘린궁 길 건너 모스크바국립대학교 동아시아센터에서 개최된 한·러 국제문학심포지엄에서였다. 심포지엄 행사가 끝나자 저녁시간이었다. 그러나 모스크바의 여름 저녁은 대낮처럼 환했다. 당장 거리로 나가 걷고 싶었다. 모스크바를 활보하기 위해서는 영어나 한국어를 구사할 줄 아는 현지인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때 아르굴이 선뜻 옆으로 다가와 섰다. 모스크바에서 나는 두 발로 걸어서 가보고 싶은 데가 많았다. 제일 먼저 도스토예프스키가 태어난 마린스키빈민병원이 떠올랐다. 이어 푸시킨의 신혼집과 빅토르최를 기리고 있는 아르바트 예술거리, 러시아 오페라와 발레 무대인 볼쇼이극장, 체호프와 고골이 묻혀 있는 노보데비..
서재의 시계 바늘은 8시38분에 멎어 있었다. 1881년 1월28일 밤, 도스토예프스키가 숨을 거둔 시각이었다. 나는 얼른 서재를 일별했다. 시계는 검은색 직사각형으로 창쪽 원형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었다. 중앙에는 책상이, 그리고 그 뒤에는 붉은 소파가 자리 잡고 있었다. 소파에 눈길이 닿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쳐 올라왔다. 서울에서 러시아로 날아오는 내내, 1만m 상공의 비행기 안에서 숨죽이며 읽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생애 마지막 장면들이 되살아났던 것이다. 아니, 그보다는 더 멀리, 오래전부터 강박적으로 만나온 도스토예프스키적인 모든 것이 한꺼번에 떠올랐던 것이다. 대상(세상) 앞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지를 누군가는 허무라, 황홀경(환각)이라 했던가. 소파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숨을 ..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하늘 아래 새소리뿐. 그것이 무엇인지 누군가 귀띔해주지 않았다면, 나는 방금 지나온 자작나무 숲과 사과나무 밭에서처럼 걸음을 늦추거나 잠시 발길을 멈추어 그대로 서 있다가 조용히 다시 앞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을 걸어갔을 것이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은 러시아의 작은 마을에 있는 톨스토이 영지(領地)의 숲길. 6월28일 아침 아홉시, 모스크바에서 남쪽으로 180㎞ 떨어진 툴라라는 도시로 떠났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툴라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톨스토이가 태어나고 묻힌 야스나야 폴라야 마을로 향했다. 영지에 들어서자 왼편에 작은 연못이 있고, 앞으로 오솔길이 길게 나 있었다. 길옆으로 자작나무가 환영하듯 길게 늘어서 있었다. 자작나무 길을 걸어 올라가자 톨스토이의 하얀 집..
일주일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1학기를 마쳤고, 남해와 경주를 다녀왔고, 메르스와 글쓰기에 대해 고통스럽게 돌아보았고, 그리고 엄마를 생각했다. 남해에 간 것은 문학과는 가장 먼 분야의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특강을 하기 위해서였다. 문학을 지속적으로 읽어오지 않은 분들 앞에 서거나 그들을 대상으로 글을 쓸 때 내게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것을 사명감으로 느끼기도 한다. 대중 앞에 설 때 나는 문학과 등가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을 지속적으로 읽어온 독자들과 만날 때보다 더 많은 에너지와 노력이 필요하다. 전혀 다른 분야에서 살아온 분들과 나는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풀어내는 것이 다르다. 외국어로 떠듬떠듬 소통하는 것과 유사한 기분일 때도 있고, 맨땅에서 헤엄치듯 곤혹스러운 경우도 있다. 남해에서의 특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