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말(馬)이 있는 곳’이라는 뜻을 지닌 터키 카파도키아 지방에 몇 개월 체류한 적이 있다. 내가 머문 곳은 카파도키아의 관문인 카이세리라는 도시로, 지척에 높이 3000m가 넘는 에레지예스산이 우뚝 솟아 있었다. 한국인뿐만 아니라 전 세계 여행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카파도키아의 괴암 동굴군(群)은 아득한 옛날 이 에레지예스산의 용암이 폭발하면서 만들어진 형상들이다. 누리 빌제 세이란 감독의 최근작 은 바로 이곳, 아나톨리아 고원의 카파도키아를 무대로 펼쳐진다. 터키 영화라면, 아주 오래전에 본 과 터키 체류 중에 구해 본 정도가 떠오른다. ‘인생의 항로’라는 뜻의 은 터키 감옥을 출소한 여섯 명의 귀향담을 배경으로 국가의 비민주적이고 비인간적인 폭력과 압제 상황을 정면으로 다룬 작품이다. 그해 칸..
대학 4학년 때인가, 전공 수업 시간에 알베르 카뮈의 를 강독했다. 사르트르의 와 함께 실존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이었다.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내 서가에는 그때 수업시간에 공부했던 원서들이 그대로 꽂혀 있다. 는 전염병으로 고립에 처한 오랑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극한 상황 속의 인간을 탐구한 작품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의사 베르나르 리유. 그는 페스트라는 공포 속에 놓인 인간들을 기록해나간다. 그 과정에서 그는 페스트보다 더 인간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적(敵)과 맞닥뜨린다. 봉쇄된 오랑 시에 급속도로 퍼져가는 불신과 절망, 체념과 고독이 그것이다. 3학년 외국소설 수업 시간에 토마스 만의 를 문청들과 읽곤 한다. 이 소설 역시 콜레라라는 전염병을 매개로 전개된다. 그러나 토마스 만이 전하고자 하는 바..
르네상스의 수도 피렌체가 아름답기로 정평이 나 있는 것은 붉은 돔의 두오모가 도심에서 중심을 잡아주고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도시 한편을 에돌아 아르노 강이 흐르고, 그 위에 베키오 다리가 놓여 운치를 더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예술의 수도 파리가 도시 미학의 진면목을 발휘하는 것은 왕의 궁이든, 시민의 아파트든 6층으로 제한된 건축물 위로 324m 높이의 에펠탑이 파란 하늘 아래 날렵하게 서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도심을 둘로 가르며 센 강이 흐르고, 그 위에 퐁뇌프나 미라보 다리가 놓여 사랑과 예술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실어 나르고 있기 때문이다. 피렌체, 파리, 프라하와 같은 세계적인 고도(古都)들은 저마다의 강과 그에 걸맞은 다리들을 거느리고 있다. 고도가 아니더라도 도시를 상징하는 다리의 예는 얼..
곶(串)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갑(岬)이라는 말도 좋다. 포구(浦口)나 만(灣)도 좋다. 글자의 모양새와 어감이 근사하다. 프랑스어에서처럼 이들에게 성(性)을 붙여 읽으면, 지형적인 본성을 실감할 수 있다. 본성은 자연이다. 곶은 남성, 포구는 여성이다. 대학 불문과 시절, 심수봉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가 유행했다. 축제 때 과가(科歌)로 이 노래를 목청껏 불렀다. 온종일 책상에 들러붙어 앉아 불어 문장을 해독하느라 끙끙대다가 파란 하늘 아래 이 노래를 소리 높여 부르면 가슴이 벅차오르면서 왠지 모르게 간절해졌다. 노래대로라면 배는 남성명사, 항구는 여성명사여야 한다. 그런데 프랑스어에서 항구는 남성이다. 가사의 뜻에 따르자면, 여성인 포구가 적합하다. 심수봉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의 뜻을 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