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촛불 아래 펼쳐보는 한 폭의 그림이 있다. 렘브란트의 ‘탕아 돌아오다’가 그것이다. 오랫동안 화집의 복제본으로만 감상했는데, 지난해 여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갔다가 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 원본을 확인했다. 여기 아버지와 아들이 있다. 아들은 누더기 옷에 거지꼴이고, 아버지는 움푹 팬 두 뺨에 백발이다. 아들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아버지는 몸을 숙여 두 팔로 아들의 두 어깨를 감싸 안고 있다. 그림에는 이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화폭을 양분하자면, 왼편에는 재회하는 부자의 모습이, 오른편에는 이들을 지켜보는 증인들의 모습이 자리 잡고 있다. 내가 촛불에 의지해 세심하게 들여다보는 부분은 바스러질 듯 늙은 아버지의 얼굴과 그 앞에 꿇어앉은 아들의 두 발이다. 아들의 한쪽 발은 신발이..
스물 세 살의 카뮈는 ‘티파사에서의 결혼’에 이렇게 썼다. “어떤 시간에는 햇빛 때문에 들판이 캄캄해진다.” 카뮈는 정오라는 시간을 문학사에 새롭게 등재시킨 작가로 통한다. 신들이 내려와 살았다던 지중해안의 고대 페허, 그 위에 내리는 정오의 햇빛, 폭발하는 색채의 꽃들, 꽃들이 뿜어내는 현기증 나는 향기들, 그리고 사방에 펼쳐진 짙푸른 하늘과 바다. 여기에서 정오란 시간적인 의미인 동시에 공간적인 의미로 읽어야 한다. 시공간적인 자연현상인 동시에 감각들의 혼융, 또는 결혼으로 읽어야 한다. 이어지는 다음 문장이 그것을 말해준다. “두 눈으로 그 무엇인가를 보려고 애를 쓰지만 눈에 잡히는 것이란 속눈썹가에 매달려 떨리는 빛과 색채의 작은 덩어리들뿐이다.”(알베르 카뮈, , 김화영 옮김) 살아가면서 우리는..
그리고 겨울이 되었다. 토요일의 삶을 잃어버린 지 한 달 하고도 열흘, 그사이, 가을 산야는 속절없이 불타올랐고, 광장에는 진눈깨비 첫눈이 내렸다. 광장을 다시 찾았고, 어둠이 내린 거리를 낯모르는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맞대고 촛불을 들고 걸었으며, 월요일이면 어김없이 출근을 했다. 어제 정오 수업에서는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소설들과 김탁환의 최근 소설에 대한 학생들의 발표가 있었다. 알렉시예비치의 와 김탁환의 는 장르적으로 ‘소설’로 분류되지만, 내용적으로는 다큐멘터리(르포르타주)에 가깝다. 알렉시예비치의 는 전쟁과 원전 사고를 겪은 구소련권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지역에 살았거나 살고 있는 200명의 다양한 여성들의 목소리(인터뷰)로 구성되어 있다. 김탁환의 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 고 김관홍 민간 잠..
코뿔소를 본 적이 있다. 아프리카 케냐에 있는 나크루 호수에 갔을 때이다. 그곳은 세계 홍학 서식지로 유명했다. 마사이 마라 초원에 사는 뭇 동물들을 만나고 나이로비로 향하던 길이었다. 홍학들이 고즈넉한 호숫가를 띠를 두른 듯 분홍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깃털들로 자욱한 호숫가를 걷고, 발길을 돌리는 순간, 눈에 들어온 것은 호수 저편, 초원 한가운데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코뿔소 가족이었다. 코뿔소를 두 눈으로 직접 본 것은 이오네스코의 연극 이후 20여년 만이었다. 나크루 호숫가 초원에서 본 코뿔소는 콧등에 한 줄로 뿔이 두 개 솟아난 아프리카 코뿔소였다. 그때까지 나는 뿔이 하나인지 둘인지, 아프리카 코뿔소인지 인도 코뿔소인지 구별할 생각도 못했다. 코에 뿔이 나 있으면 다 같은 것이었다. 아..
서울국제작가축제에 참여하는 7일 동안, 국내외 작가들과 광화문의 한 숙소에 머물며 대학로를 오갔다. 점심 식사 후에는 국내외 작가 2명이 짝을 지어 독자들 앞에서 대화를 했고, 저녁 에는 자신의 문학작품을 다른 예술 장르로 각색해 무대에 올렸다. 서울국제작가축제를 통해 다시 확인한 사실은 한 사람의 작가는 하나의 독립된 행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행성을 알아보기 전까지 작동하는 것은 각자의 나라에 대한 선입견과 정체성이다. 시인 T J 제마와 처음으로 인사하면서 그녀의 나라 보츠와나를 상상하고, 소설가 퉁 웨이거와 마주하면서는 익숙한 듯 새로운 대만을 떠올리는 것이다. 콜롬비아, 아프가니스탄, 북아일랜드 등지에서 온 14명의 외국 작가들은 다채로운 상상으로 나를 이끌었다. 그중 부지불식중에 나를 사로..
일주일 만에 지진을 두 번 겪고 나니, 하루하루가 마지막 날 같다. 멀고 가까움 없이 닥쳐온 지진 공포와 핵 위협에 매일 밤 유서를 쓰는 심정으로 눈을 감는다. 아침에 일어나 해가 떠오르는 광경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초목을 스치며 불어오는 바람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아무 일 없이 하루하루가 흘러가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순간순간 되새긴다. 태어나 겪어본 적 없는 공포와 위협이 삶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다보니, 정작 지금껏 동고동락하며 애면글면 끌어안고 있던 현실의 크고 작은 일들이 하찮아지고, 지나가지 않았음에도 지나가버린 것처럼 망연자실해진다. 체호프가 말했던가. 습관이란 일과 옷과 가구와 식구를 삼키고, 전쟁의 공포까지도 꿀꺽 삼켜버린다고. 예술만이 잃어버린 삶의 감각을 되찾게..
“아버지는 없고, 어머니 33세 농업, 할아버지 62세 어업, 삼촌 32세 선원, 재산 정도 하, 건우의 행복하지 못할 가정 환경에 많은 걸 묻진 않았다. 건우네 집은 조마이섬 위쪽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이것은 50년 전에 발표된 김정한의 단편소설 의 일단이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화자는 K중학생 건우의 담임선생님이다. 소설 속에서 “낙동강 하류의 어떤 외진 모래톱”으로 묘사되면서 조마이섬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현재 낙동강 하구 을숙도를 가리킨다. 당시 현지인들은 “강 하구에 모래가 밀려 만들어진 조그만 섬”으로 조마이섬이라 불렀다. 조마이섬뿐만이 아니라 건우 할아버지를 부르는 ‘갈밭새 영감’도 이곳의 생태 지리적인 환경 요소를 담고 있다. 그는 갈밭에서 요란하게 우는 새 같은 존재, 조마이섬 사람들의..
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이런저런 지면에 발표한 글들을 산문집으로 출간하곤 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같은 주제의 같은 제목이 다시 떠오르는 경우가 있다. 에세이나 칼럼뿐만이 아니라 소설작품 역시 마찬가지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글쟁이들에게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그래서 소설의 주제에 천착한 브룩스와 워렌 같은 연구자들은, 아무리 훌륭한 작가라 해도 평생 쓸 수 있는 주제는 둘 또는 셋이 전부라고 말하기도 한다. 나에게 어른에 대한 화두를 새삼 일깨워준 것은 최근 조용하게 회자되고 있는 성우제의 이다. 이 책은 독특한 제목에 우선 눈길이 가고, 그 다음 표지 우측 상단 별처럼 박혀 있는 인물 사진들에 눈길이 멈춘다. 작가가 청소년기부터 인연을 맺어온 스승, 도반들인데, 불문학자 김화영, 황현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