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에 갈 때면, 관람하는 주 대상이 바뀐다. 파리의 현대미술관인 퐁피두 미술관의 경우, 어느 때에는 미국적인 장면과 추상 표현을 실현한 에드워드 호퍼와 마크 로스코의 회화들을 중심으로 돌아보고, 또 어느 때에는 일상 풍경을 환각적으로 묘사한 프랑스 화가 발튀스의 작품들을 중점적으로 관람하기도 한다. 부연하자면, 이런 것이다. 극작가 앙토냉 아르토와 작가 알베르 카뮈에 의해 발튀스의 회화 세계를 새롭게 발견한 뒤라면, 또 최근 일본의 사진작가 히사지 하라의 을 접한 뒤라면, 발튀스가 단연 관람의 목적이 되는 것이다. 발튀스의 에로틱하면서도 섬뜩한 사춘기 소녀 연작과 기묘한 일상의 장면들은 고착된 삶의 국면들을 뒤흔들고, 새로운 시야를 열어준다. 이번 파리 체류 중에 퐁피두 미술관에 갈 생각을 한 것은 ..
1월7일 목요일 저녁, 파리 샤를 드골 공항에 내렸다. 2년 만이었다. 입국 수속을 간단히 마치고, 공항 밖으로 나갔다. 하늘은 어두웠고, 대기는 음울했다. 고속전철(RER)을 타고 시내로 향했다. 한창 이동이 많을 8시쯤이었는데, 예상외로 전철 안이 한산했다. 전철은 축구경기장 스타드 드 프랑스역에 정차했다가 출발했다. 문이 열렸다 닫히는 짧은 사이 1월의 음습한 밤바람이 한 움큼 들어왔다 나갔다. 도심으로 들어오는 동안 플랫폼에서, 전철 안에서, 환승역 지하도에서 나도 모르게 사람들 표정을 살피고, 그림자 꼬리를 자르듯 두려움을 떨쳐 내며 걸음을 빨리했다. 예전에 하지 않던 행동이었다. 1월10일 일요일 오전 10시, 파리 10구 레퓌블리크(공화국) 광장에는 작은 가설 무대가 설치되었다. 전자 기타 ..
새해 첫날, 바닷가 언덕의 서재에서 등대로 내려가 해가 떠오르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조촐하게 떡국을 끓여 아침식사를 한 뒤, 어제와 다름없이,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원고를 썼다. 오후에는 서재에서 잠시 벗어나 광안대교를 건너 이기대 기슭에 있는 작은 미술관으로 나들이 갔다. 바다를 건너기 전에 잠시 마음이 흔들렸다. 부산시립미술관에서는 앤디 워홀 전시가 대대적으로 진행 중이었다. 영화의 전당에서는 빔 벤더스 감독의 이 막 상영을 시작했다. 고은갤러리에서는 전이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부산에는 드넓은 바다와 마주할 수 있는 전망대가 해운대와 태종대 말고도 여럿 있다. 석양이 아름다운 낙동강 하구 몰운대, 부산항이 내려다보이는 신선대, 그리고 바다 쪽으로 길게 뻗은 이기대. 이기대 끝자락에 오륙..
어느덧 한 해의 끝에 도달했다. 매년 이맘때면 미필담(美筆談) 문학 파티를 연다. 미필담은 내가 부산에 내려와 마련한 소설 창작과 담론 연구 소모임이다. 소설 창작자이자 연구자로 살아오면서 축적한 경험을 공유하는 의미에서 출발한 것인데, 10년이 되어간다. 미필담에서는 소설을 쓰기도 하고 읽기도 한다. 세미나실에서, 카페에서, 도예 아틀리에에서, 포구에서, 풀밭에서 3시간 동안 소리를 나누어 소설을 읽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리지 않고 달려간다. 지난 2년 동안 미필담에서는 방학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를 낭독했다. 매주 3시간씩 모여 소리 내어 읽었는데, 두 번의 여름과 겨울이 지나갔고, 11권 중 2권에 도달했다. 어떤 설명도 없이 그저 목소리를 나누어 읽어갔을 뿐인데, 3시간이 지나고 나면 모두..
광주로 출장을 가면서 쌍계사에 들렀다. 아침부터 일이 진행되는 관계로 하루 전에 출발했다. 지리산 자락의 마을들과 섬진강 물길을 돌아보기 위해서였다. 남해고속도로에서 하동으로 빠져 섬진강에 산다는 은어처럼 유유히 강물을 거슬러 올라갔다. 한참을 달려도 시멘트 콘크리트 빌딩 숲은 보이지 않았다. 도시에서 찢기고 지친 넋을 달래듯 온화해졌다. 빛과 그늘의 분명한 조화, 강물과 바람의 고즈넉한 흐름, 포구의 보드라운 모래와 산 능선들의 운치, 눈 닿는 데마다 푸르른 차밭, 그리고 소나무 쌍계 계곡까지 계속되는 벚나무길. 섬진강변을 달릴 때면 외치고 싶을 정도로 행복감을 느꼈다. 봄이면 쌍계사를 꿈꾸곤 했다. 쌍계사, 화개(花開), 다솔사를 무대로 펼쳐지는 김동리의 단편 를 읽은 뒤였다. 는 떠돌이 팔자(운명)..
바야흐로 신춘문예 계절이다. 십이월 신문사 문화부에는 국내외에서 투고한 창작품들로 산더미가 만들어지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문학이 죽었느니, 자기계발서 이외에 아무도 시-소설나부랭이를 쓰지도 읽지도 않는다느니, 하는 진단과 종언을 무색하게 하는 희귀한 장면이다. 매일 눈을 뜨고, 감는 순간 자문한다. 왜 쓰는가. 덧붙여, 누가 쓰는가. 소설가들이란 ‘나는 누구이고, 왜 사는가’라는 질문에 심하게 흔들린 사람들이다. 소설이란 질문을 던지는 행위이자 해답을 찾는 과정이다. 해답은 찾아질 수도 있고, 찾아지지 않을 수도 있다. 현대소설의 주인공들은 늘 길을 떠나지만, 아득한 과거, 아름다운 시절의 주인공들처럼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표류할 뿐이다. 현대소설의 대상이 동시다발적이고 다중심 매체 환경의 인간이기에..
십이월이면, 정동길을 걷는다. 정동길을 걷는 행위는 공간 여행이라기보다는 백년의 시간 여행에 가깝다. 1㎞의 짧은 거리이지만, 양편으로 자리 잡은 근대 건축물들의 내역을 살피며 안팎을 들고 나다보면 겨울해가 서쪽으로 훌쩍 기울어진다. 정동길 산책의 정점은 정동극장과 정동교회, 서울시립미술관이 만나는 삼거리이다. 정동교회는 한국 최초의 감리교 교회당으로 서양화가 나혜석이 김우영과 결혼식을 올린 곳이다. 서울시립미술관은 옛 대법원 건물을 퍼사드(정면)만 남기고 개조한 곳으로, 한국에서 보기 드문 아치형 현관에 고딕식 3층 건물이다. 나는 정동길을 걸을 때면, 반드시 이 미술관 뜰로 들어서서 단아한 퍼사드를 감상하곤 한다. 올 십이월 정동길 여행은 좀 특별하다. 두 사람을 마음에 품고 가기 때문이다. 한 사람..
최근 출간된 는 나혜석을 매개로 15년 동안 다양한 분야에서 접근한 글들로 구성되어 있다. 수록된 글 22편의 면면을 보고 있노라면, 새삼 나혜석이란 누구, 아니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솟구친다. 내가 나혜석이라는 존재를 처음으로 의식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초, 서양 최초의 여성 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를 번역책으로 한국에 소개하면서이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17세기 초 이탈리아 로마 태생으로 당시 카라바조 화파의 일원인 오라치오 젠틸레스키의 딸이다. 딸은 아버지로부터 감식안과 솜씨를 익혔고, ‘젠틸레스키’라는 이름을 놓고 대결하는 경쟁자로 성장했다. 예술을 건 불멸의 싸움에서 성패는 서명에 있다. 캔버스에 이름을 남기는 것. 파리의 루브르박물관이나 피렌체의 우피치미술관에 걸리는 것. 그리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