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국제 히피인 오승연씨의 사진전이 지난달 23일부터 29일까지 경인미술관에서 열렸다. 오씨는 히피의 삶을 살며 여섯 대륙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닌 여행가이지만, 그의 카메라에 담긴 풍경에 명승이나 절승은 거의 없다. 사진전의 제목이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인 것처럼, 자기 존재 전체를 자연에 맡기며 살고, 서로 멀리 떨어져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한 끈으로 연결하고, 그 사람들과 다른 사람들을 연결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늘 그의 카메라를 매혹하였다. 그들은 최소한의 물질로 미래를 걱정하지 않고 살아가며 가장 작은 것으로 행복해지는 방법을 알고 있다. 태어난 땅이 가난해서 최소한의 것으로 살아야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가난에서 건강한 삶을 발견하고 그 삶에 자진해서 몸을 바친 사람들도 적지 않다...
1990년대 초에 춘천에서 서적 출판과 관련해 조금 특별한 학술회의가 열렸다. 그때만 해도 한국에 범용 인터넷망이 깔리기 전이었지만, 각종 문서들이 디지털화하는 추세에 불안을 느낀 출판인들이 책이 맞게 될 운명을 미리 타진하고 그 방책을 세우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나도 질의자로 참석했다. 대학 강단의 연구자이거나 문화예술계 인사인 발표자들은 거의 대부분 당시 유행하던 포스트모던의 문화이론을 들이대며 거대한 문화혁명의 도래를 예고했다. 그러나 출판인들에게 위안을 주는 말도 없지 않았다. 저명한 문학이론가로 연세대 영문과에 재직하며, 당시 ‘연세대 한국어사전’의 편찬을 책임지고 있던 이상섭 교수의 발언이 인상적이었다. 이런 내용이다. 당신은 한국어사전을 편찬하면서 옥스퍼드 대사전을 자주 참조한다. 그 방대..
보들레르는 ‘너그러운 노름꾼’이라는 기이한 산문시를 썼다. 시인이 마귀들의 왕인 사탄을 만난 이야기다. 마음씨 좋은 늙은 귀족의 풍모를 지닌 마왕은 온갖 지식에 통달한 존재이며, 특히 인문학에 이르러서는 그 체계 하나하나가 어떻게 성립되어 어떻게 발전했는지 꿰뚫어 알고 있다. 이런 사탄도 단 한번뿐이긴 하지만 간담이 서늘한 적이 있다. 어느 예리한 설교자가 “악마의 가장 교묘한 술책은 그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사람들에게 믿게 하는 것이라는 점을 결코 잊지 말라”고 말했을 때였다. 이 말은 악이 늘 평범한 얼굴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들이 온갖 미명을 동원하여 받들고 있는 제도와 관습 속에 교묘하게 숨어들어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은유일 것이다. 그러나 저 “악마의 교묘한 술책”을 은유로만 여기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