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인 | 에세이스트 내가 엄마에게 선사한 최초의 감정은 실망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이제서야 했다. 얼마 전 나는 아들을 낳았다. 그런데 엄마의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산부인과 검진갔다가 성별을 알아왔더니 엄마는 흥분해서 나오다가 데리고 있던 내 첫째딸을 밀어 넘어뜨렸다. 이후 태어난 아기는 첫째와 똑같이 생기기만 했는데 엄마는 계속 동생이 훨씬 잘생겼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마침내 아기 기저귀를 가는, 성별의 징표가 명백히 드러나는 최초의 순간 엄마의 얼굴은 약간 상기되었던 것 같다. 우리 엄마가 이토록 남아를 선호할 줄 몰랐다. 모를 수밖에. 우리 집엔 아들이 없다. 난 딸 둘인 집의 둘째다. 하지만 내가 뭐 잘못했나? 아빠가 Y염색체를 안 준 것뿐인데. 게다가 우리 아빠는 5남 2녀 중 막내다. ..
김지숙 | 소설가 angryinch@naver.com 지난주에 상도역 부근에 있는 희망식당 ‘하루’에 갔다. 쌍용자동차에서 해고당한 분이 운영하고 자원봉사하는 분들이 요리나 서빙을 도왔다. 수익금은 파업기금으로 쓰인다고 했다. 친구가 그날 자원봉사를 한다고 해서 응원차 간 길이었다. 메뉴는 비빔밥. 반찬도 푸짐했다. 식사 5000원이 꽤 저렴하다 느꼈는데 술 두 병을 사갔더니 안주하라고 제육볶음과 부침개가 끝없이 나왔다. (술을 판매하지 않으나 한 명당 1병까지는 들고올 수 있다.) 내고 온 돈은 기부금이 아니라 안주 값이 되어버릴 정도였다. 친구는 두부샐러드를 만들었다. 두부가 썰린 모양이나 소스의 양을 트집 잡아가며 친구를 놀렸지만 사실 맛이 괜찮았다. 한쪽에는 파업을 지지하는 손님들의 글이 가득한 ..
홍명교 | 한예종 영상원생 ‘지옥에서 보낸 한철’이었다. 한 달 동안 끔찍한 일들이 정신없이 흘러갔다. 통합진보당 부정선거 사태와 연이어 벌어진 중앙위원회에서의 폭력 사태, 한 당원의 분신, 검찰의 당원명부 압수수색과 이번 사태들과는 아무런 연계가 없는 몇몇 사회주의 단체들에게 가해진 공안 탄압, 그리고 덕수궁 앞에 차려진 쌍용차 22명의 희생자들의 분향소가 폭력적으로 철거된 일까지. ‘지옥’이란 게 달리 특별한 고통이 있어서 지옥인 게 아니라면 단체로 ‘멘붕’에 빠진 오늘날의 진보세력이야말로 지옥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 사태를 초래한 데에 일차적 책임이 있는 구당권파는 사태의 본질을 ‘마녀사냥’이나 ‘정치공작’으로 치부하면서 맞불을 놓고 버틸 뿐, 자신들이 초래한 파국적 사태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최태섭 | 성공회대 대학원 박사과정 curse13@nate.com 통합진보당 사태가 검찰수사를 기점으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검찰은 입장발표를 통해 ‘야권 단일화 관련 여론조작 의혹’ ‘핵심 인사들의 각종 금품 관련 의혹’ ‘중앙위원회 폭력 사태’ ‘야권 단일화 관련 여론조작 의혹’ 등을 수사의 대상으로 삼겠다고 공언했다. 이로써 통합진보당 사태의 ‘정치적 해결’은 더욱 어려운 일이 되었다. 사태는 어쩌면 통합진보당의 탄생에서부터 예견돼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미 한번 커다란 충돌과 분리를 겪었던 두 세력과, 이 두 세력에 표를 주는 것을 “사표”라고 주장했던 이를 중심으로 하는 세력이 선거를 위해서 ‘급만남’을 가진 정당이니 말이다. 놀라운 지점은 그 파열이 벌어지는 시점과 양상이지, 파열 자체..
홍명교 | 한예종 영상원생 언젠가 나는 노동절의 의미를 알리는 활동을 할 때, 애써 그날을 ‘메이데이’라고 표기하곤 했다. 사람들이 ‘노동’이라는 단어에 질색한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메이데이보단 노동절이란 이름이 그날의 역사적·정치적·사회적 의미를 보다 쉽게 이해하게끔 하지만, 우리의 삶을 덧씌우는 이데올로기라는 장막 때문에 제대로 전달되기 쉽지 않다. ‘노동’을 나와는 무관하고, 끔찍이 고단하며 천박한 무엇쯤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크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그날이 북한의 명절 아니냐고 묻기도 한다. ‘노동’이란 것이 얼마나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언어의 장과 동떨어진 채 존재하는지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러나 인간의 ‘노동’을 통해 가치를 창출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것의 실질적 중대함을..
최태섭 | 성공회대 대학원 박사과정 세 사람이 법 앞에 서있다. 첫 번째 사람은 굴지의 재벌그룹 회장이다. 그는 자신에게 뒤늦게 1조원가량의 유산반환청구소송을 건 형과 누나에게 맞서고 있다. 그는 이 소송에 대해 “대법원 아니라 헌법재판소까지라도 갈 것”이라며 단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소리 높여 외치고 있다. 그가 말하는 법은 그의 손안에 있는 법이다. 그는 사법계와 법조계에 수많은 ‘장학생’들을 심어두고, 떡값이나 용돈을 주며 키웠다. 그 결과 엄청난 규모의 재산은닉과 탈세, 경영권의 불법세습 같은 죄목들을 두고 대한민국과 벌인 재판에서 승소를 거두었다. 비록 잠깐의 옥살이를 하는 고초를 겪었으나 곧바로 사면을 받았고, 다시 회장님이 되어 당당하게 개선했다. 그렇게 한국사회의 끝판 왕으로 거듭난 그는..
유재인 에세이스트 봄이 오면 꼭 아기와 동물원에 놀러가야지 겨우내 벼르고 있었다. 4월이 되었고, 드디어 실행할 때가 온 것이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호랑이란 어떤 의미일 것인가! 아기가 신기해할 것을 생각하니 내가 다 설레었다. 포근한 휴일 아침, 아기를 데리고 동물원에 갔다. 그런데 아기의 반응은 생각보다 폭발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딴청을 부렸다. 사자를 앞에 두고 나무 위 까치를 가리켰고, 매점에서 키우는 고양이만 보겠다는 걸 잡아다 낙타 앞에 데려다놓았더니 소리치며 반항했다. 사실 그럴 만했다. 동물원의 동물들은 하나같이 무기력했다. 사자나 호랑이는 드러누워 잠만 잤다. 코끼리는 넋을 놓고 서 있었다. 실망하며 유인원관에 갔더니 애잔한 마음까지 일었다. 그럴 수밖에. 동물원이란 무엇인가. 동물들을..
김지숙 | 소설가 매일 아침, 지하철 2호선 사당에서 강남을 거쳐 삼성역까지 ‘마의 구간’에 탑승한다. 지하철 승객의 대부분은 회사원이다. 그중 많은 이들은 서울의 번화가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위안 삼다가도 내일 또 이 지하철을 타야 한다는 사실에 좌절할 것이다. 환승역 사당에 내리면, 일단 뛴다.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계단은 금세 피난행렬처럼 변하기 때문이다. 2호선을 향해 코너링을 할 때 홀로 피켓을 들고 서 있는 앳된 여자가 보인다. 그녀가 들고 있는 피켓의 문구는 ‘구럼비를 살려주세요’. 구럼비에 대한 안타까움이 잠시 떠오르지만 속도를 늦출 수는 없다. 최선을 다해 뛰어도 2호선에는 이미 줄이 길다. 두 대는 보내야 탈 수 있다. 스크린도어가 닫히면 지하철을 탄 사람들의 안도와 타지 못한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