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섭 | 성공회대 대학원 박사 과정 무더위와 올림픽 때문에 많은 이들이 불면의 밤을 보냈다. 연이은 오심 논란과 예상외의 선전, 운명 같은 한·일전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런가 하면 연예계에서는 집단따돌림(왕따) 논란이 있었다. 걸그룹 티아라의 컴백 과정에서 불거진 논란에 대해, 소속사는 피해자로 추정되는 멤버를 탈퇴시키는 것으로 사태를 해결하려 했다. 여기에 회사 말단 스태프의 곤궁함을 마치 탈퇴 멤버의 탓인 것처럼 돌리는 이상한 변명이 더해지면서 사태는 더욱 커졌다. 그 결과 일부 팬과 누리꾼들이 소속사에 대해 집단대응을 벌이면서 문제를 빠르게 해결하려던 소속사의 의도는 무산됐다. 그런 와중에 어떤 곳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노사 분쟁이 진행되던 SJM이라는 중소기업에서 사측이 300여..
유재인 | 에세이스트 지난해 여름이었다. 10년 묵은 ‘장롱면허’를 꺼내어 운전 연수를 받았다. 자동차운전학원에 전화해서 친절한 분으로 보내달라고 했다. 10년 전 만났던 운전학원 아저씨를 나는 아직도 미워하는데, 창밖의 여자나 살피다가 내가 버벅거리면 소리치면서 브레이크나 퍽퍽 밟아댔기 때문이다. 상담원은 그럼요 물론입니다, 했다. 약속 날 ‘도착했습니다’하는 문자메시지를 받고 나가보니 인상이 강건한 아주머니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1997년쯤 출시된 작은 차를 몰고 왔다. 햇볕에 이글거리는 차를 타기가 겁이 났다. 하지만 여자 분이라니, 그것만 해도 다행이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아주머니 남편도 운전 연수 지도를 하는데 남자들은 일이 없어서 지금 집에서 놀고 있다고 했다. 암튼 그런 남편 ..
김지숙 | 소설가 내 주변에는 동거 또는 동거에 가까운 생활을 해온 커플이 몇 있다. 그들은 시시때때로 결혼을 결심했다가 그 결심을 철회하고는 한다. 결혼을 결심하는 것은 대부분 외부적인 압박이 있을 때다. 가족의 압박(언제까지 그러고 살 거냐)과 시집간 친구들의 핍박(너도 결혼을 해야 어른이 될 텐데)이 쏟아질 때이다. 그들은 대부분 친지에게 동거사실을 숨긴다. 때때로 그들은 사회부적응자가 된 것 같은 불안에 시달린다. 하지만 이내 결혼하겠다는 결심은 거두어지고 만다. ‘결혼을 원하지 않는다’는 명백한 진실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은 동거를 지속할수록 결혼을 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고 한다. 이미 결혼한 것과 다름없이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가부장제 사회에서 결혼할 때 부록처..
홍명교 | 한예종 영상원생 daresay@naver.com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는 일련의 디스토피아 영화들처럼 오늘날 우리는 어디를 가나 비통한 소식을 접하게 된다. 안산에서는 중무장을 한 수백명의 용역깡패들이 부분파업 중인 노동자들을 때려잡았지만 경찰은 수수방관이었고, 부당회계가 의심되는 가운데 정리해고가 감행된 공장에서 노동자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것을 공권력은 ‘우수사례’로 꼽았다. 용산 참사로 죽은 철거민들의 한은 여전히 풀리지 못한 채 남겨졌고, 참사에서 아버지를 잃은 아들은 여전히 철창 속에 갇혀 있다. 대법원에서 불법파견 판결을 받은 현대차는 개정된 파견법에 따라 정규직 고용의무를 지지 않기 위해 2년 미만 노동자를 모조리 계약해지하고는 기간제로 재배치했다. 이는 법망을 피하려는 꼼수에 불과..
유재인 | 에세이스트 아기가 잠잘 때를 틈타 동요를 다운받았다. 아기는 귀가 트인 이래로 ‘코끼리 아저씨’를 좋아했고 ‘떴다떴다 비행기’나 ‘송아지’ 같은 노래를 불러주면 웃었다. 어느 정도 성장한 요즘 허밍으로 ‘산토끼’를 부르면서 돌아다닌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수준 높은 동요를 불러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고음불가라서 한계를 느낀다. 그래서 신중하게 선별해 20곡 정도를 받았다. 관찰 결과 아기는 멜로디가 단순하고 반복적이며 이왕이면 된소리가 들어가는 동요를 좋아한다. 그러니까 아직 음악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조금 더 크면 노래를 따라 부르고 나아가 가사를 통해 자신의 세계관을 확립해 나가리라 믿는다. 그러자면 동요 가사에 따라 신중하게 들려주어야 하는데, 특히 인상 깊은 동요가 몇 곡 ..
김지숙 소설가 매일 가던 지하철역이 어느 날 잘나가는 여배우의 사진으로 도배가 되어 있다. 한 면 전체에 실물보다 큰 크기의 사진이 붙었으니 ‘도배’라는 표현은 과장이 아니다. 또 다른 역에서는 밖으로 나가는 계단 옆면마다 시트지가 붙어 있다. 뭔가 해서 거리를 두고 다시 봤더니 은행 로고다. 지하철에 타도 마찬가지다. 선반 위, 출입문 양옆은 모두 광고를 위한 자리다. 바닥에는 파도그림이 승객들의 발밑에서 넘실거린다. 휴가철을 겨냥한 여행사의 광고다. 눈의 피로감에 못 이겨 출입구 유리 밖으로 보이는 풍경에 집중하려던 찰나, 유리창에 붙은 광고가 눈에 들어온다. “이곳에 기대지 마세요. 이곳에 광고하세요. 광고 게재 원하시는 분은….” 걸어가는 곳마다 광고가 보인다. 요즘에는 눈과 귀가 피곤한 정도를 ..
홍명교 | 한예종 영상원생 지난 주말 나는 고교시절의 수학여행 이후 처음으로 경주엘 갔었다. 그곳에서 열린 친한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아침부터 땀을 뻘뻘 흘리며 KTX에 올라탔다. 그 열차는 결혼식에 참석하는 하객들로만 가득 찬 신기한 열차였다. 서울에서 올 하객들을 위해 통째로 빌린 모양이었다. 몇 년 만에 보는 동기, 후배들, 처음 본 신부 측 사람들 모두 번듯한 정장 차림이었지만 나는 달랑 티셔츠에 청바지, 싸구려 운동화, 그리고 작은 우산뿐이었다. 평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잘도 살아왔건만 경주로 내려가는 내내 내 처지가 너무 초라하다고 느꼈다. 바보 같은 생각임에 틀림없었다. 동대구역을 지나고 나서야 나는 차창 너머에 펼쳐진 초록 들판의 풍경에 간신히 몰입할 수 있었다. 결혼..
최태섭|성공회대 대학원 박사과정 여기 두 개의 문이 있다. 하나의 문은 농성자들이 화염병을 던지며 저항하고 있는 망루로 통한다. 다른 하나는 막혀 있다. 경찰은 우왕좌왕했다. 어느 문이 망루로 통하는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2009년 1월20일 새벽 용산4구역 남일당건물, 세입자들과 전국철거민연합의 회원들이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벌인 점거농성이 시작된 지 하루가 조금 지났을 때였다. 급작스레 들이닥친 경찰의 강경진압은 농성자 5명과 경찰관 1명의 죽음으로 막을 내렸다. 그리고 대법원은 경찰에게는 무죄를, 농성자들에게는 4~5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은 집요한 영화다. 농성자들이 건물을 점거하고 망루를 짓기 시작한 때부터, 그 망루가 검은 연기에 휩싸이며 불에 타오를 때까지의 경과를 집요하게 추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