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명교 | 한예종 영화과 학생 얼마 전 워쇼스키 남매의 영화 를 흥미롭게 보았다. ‘타임’지는 지난해 최악의 영화로 이 영화를 꼽았고, 국내에서도 평론가들은 혹평을 쏟아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영화가 전형적인 갈등 구조와 아시아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적 이미지 등 단점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느 영화에서는 찾기 힘든 미덕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6개의 시간들이 끊임없이 교차되며 인류사의 위기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인간성의 몰락, 위기가 만성화된 파국적 세계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지, 억압적 세계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보편적 과제는 가능한 것인지, 목숨을 건 도약과 실천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를 말이다. 오늘날 우리는 누구나 이런 근본적인 질문에 직면..
최태섭 | 문화평론가 가슴이 서늘하다. 단지 한파 탓만은 아니리라. 많은 이들이 지난 5년간 차고 넘칠 만큼의 고통을 받았다. 그래서 ‘어쩌면 이것으로 충분한 것은 아닐까?’라는 착각을 잠시나마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2012년에 있었던 두 번의 선거에서 이 고통은 그저 계산을 위해 필요한 많은 변수 중의 하나로 취급될 뿐이었다. 저마다 승리의 열쇠를 쥐고 있노라고 호언장담하는 가짜 선지자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가운데, 고통은 점점 그늘진 곳으로 밀려났다. 게다가 결과는 그나마 신통치도 않았던 야당의 패배였다. 향후 5년간 국가를 대표하게 될 이들은 벌써부터 이 고통에 대해 선을 긋고 있다. 해고투쟁과 사측의 손배소에 고통받던 노동자들의 자살에 대해 인수위의 입장을 묻자 “그게 당선인과 무슨 상관”이..
노정태 | 자유기고가 빵 한 덩어리를 훔친 죄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연거푸 탈옥을 시도하고 또 붙잡힌 끝에 급기야 19년을 감옥에서 보내게 된 한 남자가 있다. 청춘을 모두 감옥에서 탕진한 그는 끝없는 분노와 사회에 대한 증오심만을 가진 채 하룻밤 몸을 누일 곳을 찾기 위해 방황하다가, 살아있는 성자로 불리던 미리엘 주교의 문을 두드리게 된다. 이것은 최근 화제를 불러오고 있는 영화 의 시작 부분 줄거리이면서, 동시에 그 원작이 되는 빅토르 위고의 소설 내용이기도 하다. 이어지는 내용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장발장은 은혜를 배신하고 은식기를 훔쳐서 달아나려 하지만, 미리엘 주교는 ‘나는 이 그릇뿐 아니라 은촛대도 주었다’고 거짓말을 해서 장발장을 구해낸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적지 않은 사람..
유재인 | 에세이스트 jein82@naver.com 크리스마스가 지나갔다. 얼마 전 에 이런 말이 나왔다. “이 방송은 혹시 실수로라도 어린이들이 들을 가능성이 있어서 이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산타할아버지는 있습니다.” 이 믿음을 지켜주는 건 중요하다. 난 지난달부터 3살짜리 아이에게 동영상을 보여주면서 산타할아버지를 가르쳤다. 덕분에 아이는 참 금욕적인 생활을 했다. 카시트에 앉고 싶지 않거나 밥을 먹기 싫을 때 산타할아버지에게 전화한다고 으름장을 놓으면 착한 아이가 되어야 했다. 산타할아버지가 없었으면 어쩔 뻔했는가. 나도 그런 기억이 있다. 아주 어릴 때, 집에 멀쩡히 있던 아빠가 갑자기 밖으로 뛰쳐나가더니 외쳤다. 산타할아버지가 오셨다! 그리고는 선물을 가지고 들어오셨다. 나는 언니와 후다닥 뛰어..
김지숙 | 소설가 여기, 부모와 자녀로 구성된 한 가족이 투표장소로 향하고 있다. 한 가족이지만 지지하는 후보도, 선거를 대하는 태도도 다르다. 한지붕 아래 살지만 고향도 다르고 성장과정도 다르며 사회에서 처해있는 상황도 다르다. 아버지와 딸은 지지하는 후보가 다르다. 딸은, 정책에 대한 뚜렷한 비전도 없는 박근혜 후보가 독재자의 딸이라는 사실이 오히려 날개가 되어 높은 지지율을 기록한다는 사실이 납득이 되지 않는다. 아직 투표가 나라를 바꿀 수 있다고 믿고 있는 딸은, 20대 투표율이 관건이라는 말에 친구들에게 카카오톡으로 투표를 독려하기에 여념이 없다.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와 카카오톡 친구를 맺고 TV토론에서 이정희 전 후보의 발언에 속시원해한다. 아버지는 가 딸을 저 지경으로 만들어놨다고 생각한다...
노정태 | 자유기고가 경제학자 두 명이 길을 걷다가 개똥을 발견했다. 경제학자 A가 B에게 제안했다. 자네가 저 개똥을 먹으면 내가 100달러를 주겠네. B는 고심 끝에 그 조건을 받아들였고, 100달러를 벌었다. 좀 더 가다보니 개똥이 또 하나 나왔다. 이번에는 B가 A에게 같은 제안을 했고, A가 개똥을 먹어서 100달러를 B로부터 받았다. 정산을 해보자. 두 사람 모두 개똥을 먹었고, 100달러씩 벌었지만 또 100달러를 썼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둘 다 개똥만 먹고 한 푼도 못 번 셈이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0달러씩 서로 두 번 거래를 한 셈이어서, GDP(국내총생산)는 200달러 올라간다. GDP가 현실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행복과 삶을 제대로 반영해주지는 못한다는 교훈을 전달하고자..
유재인 | 에세이스트 영화 에서 헥토르는 이런 말을 한다. “나의 원칙은 간단하다. 신을 섬기고, 내 여자를 사랑하고, 조국을 지키는 것이다.” 원칙에 걸맞게 그는 위험에 처한 가솔들을 대피시키고 제 한 몸을 가족과 국가를 위해 바친다. 반면 아킬레우스는 후세 사람들이 자신을 기억해주기만을 바랐고, 자손을 남기는 데는 별 관심이 없었다. 당시 ‘이기적 유전자’를 읽은 지인은 분석했다. 자식을 지켜낸 헥토르는 유전자의 기계 역할을 충실히 하는 인간이고, 아킬레우스는 그걸 초월한 인간이다. 나는 그게 그럴듯했다. 그런 측면에서 보니 헥토르는 조금 찌질했고 곧 죽어도 아킬레우스처럼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기게 마련이니까. 그리고 8년이 지났다. 정신을..
김지숙 소설가 8년 전, 내가 다니던 대학교 바로 옆에 대형 쇼핑센터가 들어선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엄밀하게 말하면 정문 바로 옆이었지만 얼핏보면 대학의 일부처럼 보이는 건물이었다. 당시 나는 학교 신문사 기자로 일하고 있었는데, 기자들은 학교 앞 상업화에 반대하는 의미로 쇼핑몰 건립에 반대하는 침묵시위를 하기로 했다. 검은 테이프를 ‘X’ 모양으로 붙인 마스크를 하고 반나절 동안 쇼핑몰 앞에 피켓을 들고 서 있었다. 피켓에는 “학교 앞 상업화 반대, 학생들을 위한 공간을 보장하라” 대강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시위를 한 보람도 없이 쇼핑몰은 계획대로 공사에 들어갔고 곧 문을 열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장사가 잘되지 않았고 머지않아 폐업 선언을 하고 말았다. 학생들은 학교의 일부인 것마냥 정문 옆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