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명교 | 한예종 영상원생 “높은 놈, 배운 놈, 잘난 놈, 있는 놈! 모두 다 내 얘기를 들어봐라. 나도 말 좀 해야겠다. 이 높은 데 있을 때 큰소리 좀 쳐보자!” 1980년대 최고의 영화 에서 빌딩 옥상에 오른 만수(안성기)가 이렇게 외친다. 구경하는 시민들, 공권력, 기자들은 이를 노동자들의 농성 투쟁으로 오인하고, 여기서 비롯된 일대 촌극에 동참한다. 그리고 칠수와 만수는 결국 자신들이 살고 있는 시대의 비극성을 확인한다. 빌딩 아래서는 누구도 칠수와 만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것은 공허한 메아리로 자동차 소음 가득한 도시의 하늘로 사라질 뿐이다. 만수는 뛰어내리고 칠수는 체포됨으로써 그들의 의도치 않은 고공농성은 이렇게 끝난다. 외환위기의 거센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하던 1997년 가을 중..
유재인 | 에세이스트 뽀로로는 많이 알려졌지만, 실제로 그의 위력을 느껴본 이는 얼마 없으리라. 우리 아이 역시 뽀로로의 노예다. 아이는 뽀로로만 보면 직전까지 자신을 괴롭히던 부정적 감정들을 망각한다. 오죽하면 처음으로 말한 문장이 “빼빼빼 아나 벌래여(뽀로로 하나 볼래요)”였다. 그 간절함은, 나도 드라마를 보며 느껴봤기에 안 보여주기도 어렵다. 그러고보니 뽀로로는 내가 푹 빠졌던 미국드라마 를 닮았다. 친구들끼리 노닥거리는 게 이야기의 전부라는 점에서 말이다. 정말이지 뽀로로와 친구들은 하루 종일 논다. 썰매를 타거나 아니면 낚시를 다니면서 제대로 논다. 그리고 하루종일 먹는다. 먹어도 초콜릿 쿠키나 딸기 케이크처럼 맛있는 것만 먹는다. 그래서 나는 이걸 계속 보여줘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한다. 이런..
김지숙 | 소설가 얼마 전, 대선을 반장선거에 빗댄 영상을 보다가 옛 반장선거의 추억이 떠올랐다. 초·중·고등학교의 반장선거는 서로에 대한 정보가 아직은 빈약한 학기 초에 이뤄지기 때문에 성적이나 외모만 보고 뽑는 경우가 많았다. 마지막 반전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연설 시간인데 후보들이 나와서 ‘반장으로 뽑아주신다면~’으로 시작하며 공약을 내놓는 시간이다. 그때도 나는 공약을 전부 믿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 그 아이가 어떤 말을 하는지는 여전히 중요했다. 학교 도서관을 만들겠다고 하면 학급도서 정도는 만들어질 가능성이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반장선거가 있다. 중학교 때 후보들이 나와서 공약을 내놓았다. ‘화장실 청소를 다 하겠다.’ 이건 속셈이 너무 뻔했다. ‘솔선수범하겠다.’ ..
홍명교 | 한예종 영상원생 안철수 대선 출마 기자회견문에서 SF소설 작가 윌리엄 깁슨의 말을 언급한 이래 그의 책들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단다. “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단지 널리 퍼져있지 않을 뿐이다”라는 매력적인 인용구가 부지불식간에 일간신문의 정치면을 장식했다. 안철수는 깁슨의 이 비의적 잠언을 빌려 자신이 밀고 있는 ‘혁신 경영’의 이미지를 알리려 했던 모양이다. 과거 ‘혁신’의 이미지는 소위 사회주의자들의 차지였지만 오늘날에는 그와 반대가 되어버렸다. 2000년대부터 우후죽순격으로 출간된 무수한 혁신 경영의 사례를 담은 책들의 집대성 같은 존재인 안철수가 끊임없이 강조하는 ‘융복합’ ‘혁신’은 오늘날 좌파 대신 ‘혁신’의 이미지를 거머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들의 대표 슬로건이다. 경제적으로는 철저..
노정태 | 서강대 철학과 대학원생 필자가 2010년 가을 무렵 입대를 선택한 것은 2012년 여름에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해 연말이 대선이니 이른바 ‘논객’들의 활약이 도드라질 것이고, 따라서 긴 공백을 뚫고 입지를 확보하는 일도 좀 더 쉬워질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한 장의 전역증을 주민등록증 뒤에 살포시 감춰놓고 다니게 된 지금, 그 계산은 명백히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2012년 12월19일에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논객’이 활약할 만한 입지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 그 조건들이란 무엇인가? 첫째, 피아 대립 구도가 명확해야 한다. ‘우리편’과 ‘너희편’을 확실히 나눠서, 내 글이 먹혀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그 ..
유재인 에세이스트 서재 정리를 하다가 을 발견했다. 난 간디에도 자서전에도 관심이 없는데 이게 왜 여기 있단 말인가. 이것은 남편이 연애 초기에 준 생일선물이었다. 여자친구의 생일선물로 인도의 위대한 정신적 지도자의 자서전이라니. 속지에는 다음과 같이 증정 의도가 적혀있다. “너는 내 눈에 대인이야. 그래서 세계의 대인에 관한 책을 준비했어. 우리 모두 간디처럼 살자.” 간디처럼 살자고? 생일날 빈손으로 만나기 무안하여 급하게 골라온 거라고 의심할 수밖에 없다. 당시 이 책을 읽지 않았다. 나는 세계의 대인이 되기보다 회사원이나 되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좀 미안한 마음이 들어 읽어보기로 했다. 같은 프로그램도 열심히 보는데 유명한 분의 자서전쯤이야 못 읽을 것도 없는 것이다. 그러다 중요한 점을 깨달았는..
김지숙 | 소설가 아버지가 퇴직한 뒤의 변화 중 하나는 텔레비전을 함께 시청하는 시간이 길어졌다는 점이다. 자연히 뉴스를 함께 볼 일도 생기고 뉴스 내용에 대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할 기회도 많아졌다. 이 시간이 내게 편하지만은 않다. 특히 대선이나 정치적인 뉴스가 나올 때면 아버지와 나 사이에 미묘한 긴장감이 형성된다. 처음에 아버지는 혼잣말하듯이 우회적으로 당신의 의견을 밝힌다. “저게 뭐하는 짓이냐” “잘들 한다” 등등. 혼잣말을 빙자한 의사표현이 고조될 즈음이면 때가 가까워졌다는 징조다. 나는 아버지가 나에게 말을 걸 타이밍을 거의 정확히 알 수 있고, 아버지 역시 내가 아버지를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쨌든 아버지와 나는 유전자를 공유한 데다 성격과 사고방식이 비슷한 부녀 사이인 것이다..
홍명교 | 한예종 영상원 학생 유난히도 요란스럽게 태풍이 지나갔다. 북상하면서 커질 것이라는 예측은 다행히도 빗나갔고, 국민들은 태풍보다 더 태풍스러운 뉴스들로 며칠을 보냈다. 그 사이 우리는 끔찍하고도 아이러니한 풍경들을 여유 없이 흘려보냈다. 태풍의 스펙터클한 위용에 대해 걱정하다보니 우리가 겪는 일상적인 폭력에 대해선 아무것도 몰랐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해외시장에서 보이고 있는 현대자동차의 ‘위대한 도약’에 대한 언론의 대대적인 선전을 접하는 사이, 국내 현장의 공장들에서는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저항이 이어졌다. 공장 안에서 관리자와 경비로 둔갑한 용역깡패들이 사내하청 노동자에 대한 납치와 감금, 폭행을 자행하고 있는 가운데서도 사회의 연대를 구하는 고군분투는 그치지 않고 있다. 그러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