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러진 빗줄기가 흩어진 눈송이를 본 적 없지만, 날씨를 수리하는 수리공을 본 적은 있다 양동이에 빗물을 받거나 지붕에 쌓인 눈 더미를 치우는 수리법이 아니라 날씨들의 뒤끝, 우산이라든가 눈이 녹지 않은 오르막에 모래를 뿌리는 일을 하는 수리공을 많이 봤다 서둘러 장독 뚜껑을 덮거나 빨래를 걷는 일도 알고 보면 날씨를 수리하는 일이다 앞서가는 절기들에 도착하는 계절 모두 수리하고 손을 봐야지만 싹이 트고 까끄라기가 생기고 보리숭어들이 연안을 지나간다 고인 물의 물꼬를 트는 일, 새가 둥지를 떠나는 일도 모두 관련이 있는 것 날씨 수리는 끝이 없고 계속된다 무엇보다도 절그럭거리는 빗줄기를 허리며 어깨에 넣고 있다가 비가 그치고 개이면 씻은 듯이 낫던 그런 수리공이 그중 제일이었다 이서화(1960~) ‘비설거..

그림을 그리려고 앉았더니 더위가 문제다. 실상은 시를 쓰고 있으면서 왜 그림을 그린다 하는가? 다른 행동을 하는 다른 인물을 써내면서 자판 앞에 앉은 자신을 지우려 함인가? 아니면 그림을 그리듯, 이라는 말처럼 시쓰기에 대한 일종의 비유로 이런 말을 하는가? 지우려 지우려 해도 끈질기게 거기 버티고 있는 자 누구인가? 그림 그리는 자들도 자신을 그림 속 주연으로 그려넣곤 하는가? 이를 테면 외젠 들라크루아의 이라는 그림 속에 들라크루아 자신을 그려넣기, 아니면 자신의 영화에 출연하는 수많은 감독들, 앨프리드 히치콕, 로만 폴란스키, 마틴 스코세이지, 우디 앨런, 쿠엔틴 타란티노, 박찬욱, 봉준호까지도! 이때 끈질기게 이들을 촬영하는 자 누구인가? 거기 절대적인 시선, 누구인가? 역시나 더위가 문제다. 그..

어린 새가 전깃줄에 앉아 허공을 주시한다 한참을 골똘하더니 중심을 잃고서 불안한 오늘을 박차고 날아오른다 나의 비행은 어두운 뒤에서 이루어졌다 학교 뒷산, 농협창고 뒤, 극장 뒷골목 불을 켜지 않은 뒤편은 넘어지거나 자빠지는 일의 연속이었지만 뒤보다 앞이 캄캄하던 시절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앞뒤를 가리지 않았다 백열등을 깨고 담배연기 자욱한 친구의 자취방을 박차고 나온 날, 전깃줄에 걸린 별 하나가 등을 쪼아 댔다 숙제 같은 슬픔이 감전된 듯 저릿하게 퍼지는 개학 전날 밤, 밀린 일기보다 갈겨 쓸 날들이 무겁다는 걸 알았다 새가 날 수 있는 건 날개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제 속의 무게를 훌훌, 털어 버리는 까닭일지도 모른다 그게 날갯짓이라면 모든 결심은 비상하다 박은영(1977~) 짧은 여름방학은 늘 아..

그 진흙밭 속에서 이해도 득실도 아랑곳없이 다만 이고 지고 모시고 가는 일념만을 올곧게 뽑아 올려 피운 저 연꽃들이 여름날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즈막 겉과 속이, 말과 삶이 영 다른 퇴락한 꽃들이 나는 오늘도 신문지상 활자 갈피에서 툭툭 지고 있는 걸 읽는다. 뜻하지 않게 기득권에 안주한 말라비틀어진 내로남불의 헛꽃들, 그래도 지난날 순결한 젊음으로 역사 앞에 핀 적이 있었지. 홍신선(1944~) 시인은 “가재골 우거에 와 묻힌 뒤” 이 시를 썼다고 한다. 그곳에서 풋나무와 뭇짐승, 갖가지 자연현상을 경전처럼 받들며 살고 있다. 속세를 떠난 삶은 아닌지라 시인은 이른 아침에 배달된 신문을 펼친다. 신문을 읽는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민생은 나 몰라라 한 채 기득권만 지키려는, “말과 삶이 영 다른 퇴락한..

물의 거죽이 커터 칼날처럼 반짝인다 가라앉고 싶어도 가라앉을 수 없는 슬픔의 표면장력으로 한 발 한 발 물 위를 걷는다 물 위는 절망과 두려움에 주저앉지 않으려고 몸이 물보다 가벼워진 이가 홀로 걷기 좋은 곳. 임경묵(1970~) 개울이나 연못, 물웅덩이에는 여러 생물이 산다. 붕어는 물속에 살고, 개구리는 물 안팎을 자유로이 왕래하고, 소금쟁이는 물 위에 떠 있다. 각자 있어야 할 자리에 존재함은 지극히 당연하다. 서로의 영역이 자연스레 받아들여져야 평화가 유지되고 대상도, 자리도 빛난다. 시인은 당연함을 당연함만으로 보지 않는 독특한 시선을 가지고 있다. 다른 방식으로 세상의 풍경과 마주한다. 시인은 물에 살면서도 물속에 들어갈 수 없는 소금쟁이에서 슬픔을 본다. 물 위의 소금쟁이에서 집에 들어가지 ..

당신의 포옹은 어색해 그 안부는 등받이 없는 의자 같아서 안온함이 지속되진 않는다 아무나 표절해도 되는 꽃말은 꽃을 선물해놓고 얼버무리는 핑계 같은 것 애인 앞에서의 눈물도 깨진 사랑을 수리해주는 천사의 접착제일 뿐 천 개의 퍼즐을 맞추는 일보다 그림 하나를 천 개로 나눈 사람이 대단해 운동화 끝이 자주 풀리는 것은 묶느라 구부리는 사이 내 안에 고인 것들이 흘러나가게 하라는 어린 귀신의 배려겠지 내일 당장의 일이면 불면으로 경고하는데 먼먼 일이라면 타인의 것인 양 잊어버리게 하는 신은 근시임에 틀림없어 내게 없다는 그 철학은 어른과 아이의 생각 차이를 화해시키는 일 전영관(1961~) 어려운 시를 읽다 보면 그림 퍼즐을 맞추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시어와 문장, 행간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숨겨놓고, 그..

눈 깊어진 당신이 귀 얇아진 당신이 지난 시간의 흔적을 밟아온 휘파람 소리는 은회색의 저녁, 긴 꼬리를 끌어당긴다 사람꽃 져버린 자리, 온기 없는 골목이 슬그머니 미끄러진다 서쪽으로 밀린 구름들도 작당했는지 물끄러미, 서슬이 붉다 나 없이도 여전히 아름다운 세상이다 진란(1959~) 넓고 번잡한 도로는 골목과 연결돼 있다. 담과 벽이 마주한 골목에는 전봇대가 서 있고, 적당한 높이를 차지한 보안등이 밤을 밝힌다. 골목을 지나가면 어둡다 밝아지거나 밝았다 어두워진다.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우리 삶을 닮았다. 골목에는 보도블록 사이에 핀 씀바귀꽃, 아슬아슬하게 비켜가는 자전거, 느릿느릿 걸어가는 고양이, 전선에 앉아 있는 새 떼 등은 그대로 풍경이 된다. 골목은 여러 개의 문을 달고 있다. 막힌 골목은 길..

꿈에서 발자국이 나왔습니다 그대로 밟고 올라서자 화를 냈습니다 어째서 자신의 무릎을 함부로 밟는 거냐고 도대체 생각이란 게 있는 건지 물었습니다 나는 그것이 정강이뼈인 줄 몰랐다고 해명해야 했지요 그는 화를 내고 가버렸습니다 다시 가지 않는 언덕에 흰 철쭉이 피었습니다 윤지양(1992~) 한 강연 자리에서 시인을 처음 만났다. 강연 중 시인은 느닷없이 모자를 벗어 “이게 무엇일까요” 질문을 던졌다. 그것은 당연히 모자였지만, 시인은 다른 대답을 원하는 듯했다. 모자나 에 나오는 보아뱀이란 답이 나왔고, 대부분 침묵했다. 다시 가방에서 향수 3개를 꺼낸 시인은 모자와 함께 향기를 맡아보라 했다. 차례가 왔을 때 들고 있던 연필로 모자를 돌렸다. 모자에 밴 향수를 맞혀보라는 거지만 시인이 다른 대답을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