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구멍을 뚫으면 피리가 되지 몇 개를 막으면 노래가 되지 노래에 구멍을 뚫으면 춤이 되지 자면서도 멈출 수 없는 춤 떼 지어 다녀도 늘 혼자인 춤 구멍이 다 막히는 날 노래도 춤도 다 막히고, 막이 내리지 다음 공연은 아직 미정 정채원(1951~) 자화상 같은 이 시는 막힘과 뚫림, 멈춤과 흐름의 인생사를 피리와 노래, 춤을 통해 보여준다. 희로애락(喜怒哀樂)이라는 말이 상징하듯, 인생은 기쁨·즐거움의 ‘흐름’과 노여움·슬픔의 ‘멈춤’이 반복된다. 살다 보면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있다. 내 삶만 불행한 것 같지만 세월이 흐른 뒤 되돌아보면, 슬픔 속에 기쁨이 있음을 알게 된다. 휴지(休止) 같은 막힘이나 슬픔과 방황의 한때도 필요한데, 늘 막힘없는 흐름과 좋은 결과만을 원한다. 끝없는 인간의 욕심..
흐르는 물은 쉬지 않는다. 이제 막 바다에 닿는 강을 위해 먹빛 어둠 뒤에서 지구가 해를 밀어 올리고 있다. 너의 앙다문 입술과 너의 발등에서 태어나는 시간과 사랑과 눈물이 가 닿는 세계도 그러할 것이다. 오늘 하루치의 바람 잊지 않으려고 나뭇잎들이 음표를 던진다. 새가 하늘을 찢는다. 새카맣게 젖은 눈빛 꺾이던 골목에도 쿠렁쿠렁, 힘찬 강 열리고 푸른 햇발 일어서는 소리 들린다. 흐르는 물은 반드시 바다에 가 닿는다. 배한봉(1962~) 시인은 시 ‘육탁’에서 “바닥보다 더 깊고 어둔 바닥을 만난 적이 있다”며 “생애에서 제일 센 힘은 바닥을 칠 때 나온다”고 했다. 삶의 바닥까지 내몰린 사람들은 그 바닥을 쳐야 다시 일어설 희망이 생긴다. 온몸에 피멍이 들더라도 바닥을 쳐야 아침을 맞이할 수 있다. ..
그가 도장을 찍는다. 나는 사인을 한다. 가볍고 밋밋한 종이 서너 장에 이백 평 남짓의 땅이 널브러져 있다. 그 땅 위를 넘나들던 태양과 비와 구름과 그곳에서 자라던 이름 모를 작은 나무 몇몇과 그 나뭇가지 사이를 좋아라 날아다니던 새들과 발자국 없이 막무가내 기어오르던 온갖 벌레와 주변의 잡초들이 생애 처음으로 저녁을 맞는다. 내게 본적을 두고 뿌리내리던 모든 것들이 선택의 여지 없이 다른 이에게 팔려 간다. 사람과 사람 높이만큼 오르내리던 말과 삐뚤거리는 글씨와 먹구름으로 도장을 찍고 달빛 사인하는 것으로 타인의 것이 된다. 신의 옆구리를 훔쳐 내 것이라 명명해 왔던 것들이 바퀴 없이 타인에게 천천히 굴러간다. 입과 눈과 귀가 틀어막힌 채 은빛 거미줄마저 고스란히 아무도 모르게 그려 넣었던 오로라는 ..
어떻게 해야 늘 그들이 될 수 있을까 바람 지나갈 때 침묵을 섞어 보낼 수 있을까 마음 걸림 들키지 않고 조용히 몇 잎 흔들며 서 있을 수 있을까 바위 햇살 개미 멧새들… 사이 천천히, 느긋이 타오를 수 있을까 베이더라도 고요히 수평으로 쓰러질 수 있을까 구름 속으로 손 뻗으며 느리게, 느리게 바다로-깊이로만 울 수 있을까 정숙자(1952~) 이 시의 첫 행 “어떻게 해야 늘 그들이 될 수 있을까”에는 많은 의미가 내포돼 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화자 ‘나’는 그들과 조금 떨어진 채 간격을 유지하고 있다. 그들을 오래 지켜보며 곁으로 다가가려 한다. 불러주길 은근 기다리며 외롭고 쓸쓸한 심경을 내비친다. 그들과 함께하려면 곁으로 다가가야 하지만, 그들이 되고 싶거나 직접 만나 대화하려는 건 아니다. ..
타이어에 낀 돌 세개를 빼냈습니다 너무 힘을 주는 바람에 하나는 멀리 날아갔습니다 반쯤 닳아버린 잔돌 두개를 민들레꽃 그늘에 가만 내려놓습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끌려왔겠지요 매끄럽게 닳은 돌의 배를 맞대주니 기어코 만난 연애 같습니다 바퀴가 생기기 전부터 오늘이 준비됐던 걸 알았다면 부서지고 망가지는 통한의 길을 고마워했을까요 오늘은 타이어에 낀 잔돌을 뽑아냈습니다 하지만 풀밭 어딘가로 날아간 나를 찾지 않기로 합니다 작디작아진 내가 질주밖에 모르던 오래된 나를 퉁겨내고 홀로 맞이하는 첫날이니까요 몸속 깊은 곳에 박혀 있던 상처투성이 돌을 빼내어 풀밭에 내려놓을 때마다 나는 첫사랑을 발명하니까요 이정록(1964~) 다들 자동차 바퀴나 신발 바닥에 박힌 돌 하나쯤 빼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손가락으..
알면서 모른 척 지나쳐 본 일이 있다 이웃집 언니가 가게에서 초콜릿을 훔치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물방울처럼 생긴 눈을 계속 감았다 뜨는데 곧 비가 내릴 것만 같았다 밤이 되면 사람들은 각자의 방에서 눈동자를 켜고 환해지다가 하나씩 전원을 내리고 어두워졌다 뾰족한 빗방울이 무서워 두꺼운 이불 속에 숨었다 이웃집 언니는 욕실 타일을 하나씩 뜯어 입에 넣어 주었다 깜깜한 바닥을 더듬거리는 동안 균열이 생겼다 축축한 말들이 노랗게 젖어 있었다 성은주(1979~) 누구나 비밀 하나쯤 간직한 채 살아간다. 좋아하는 사람을 지켜주려 끝내 입을 닫았는데, 알고 보니 다들 알고 있는 경우도 있다. 나와만 친한 게 아니라, 그가 여럿에게 “너만 알고 있어” 하고 비밀을 털어놓았기 때문이리라. 어쩌면 너무 티 나게 행동해..
저 황홀, 눈이 멀게 환한, 생이 녹도록 따뜻한 저 찬란, 눈부시게 느슨한 생의 밀도 내려놓고 저 뭉클, 촘촘한 볕의 농도에 홀려도 좋을까 씹어야 할 고통의 지분 아직 다 하지 않았는데 우수는 멍하니 춘수에 넋 놓아도 좋은 것일까 아무것도 변명하지 않으려 겨우내 악물었을까 치통은 최선을 다해 조금 더 욱신거려도 좋을까 최정란(1961~) 대상을 멍하니 바라보는 놀멍, 물멍, 불멍 등이 유행이다. 아무 생각 없이 멍하게 있다는 ‘멍때리다’는 말이 아름다운 풍경을 상징하는 명사와 결합하면서 심리적 안정과 휴식을 뜻하는 말로 바뀌었다. ‘놀멍’은 노을을, ‘물멍’은 물을, ‘불멍’은 불을 그냥 멍하니 바라보는 것이다. ‘멍’은 바라보지만 보지 않는 것, 생각을 유보하거나 멈춰 긴장된 몸과 마음에 이완과 안정을..
다소곳한 문장 하나 되어 천천히 걸어나오는 저물녘 도서관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게 말하는 거구나 서가에 꽂힌 책들처럼 얌전히 닫힌 입 애써 밑줄도 쳐보지만 대출 받은 책처럼 정해진 기한까지 성실히 읽고 깨끗이 반납한 뒤 조용히 돌아서는 일이 삶과 다름없음을 나만 외로웠던 건 아니었다는 위안 혼자 걸어 들어갔었는데 나올 땐 왠지 혼자인 것 같지 않은 도서관 송경동(1967~) 시인을, 아니 시인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시 ‘잊지 못할 여섯 번의 헹가래’에 의하면 “2014년 세월호 진상규명 추모 행진”에서 서울 보신각사거리에서 청와대 방향으로 대오를 틀고 경찰과 대치할 때였다. “방송차 지붕에 올라 마이크”를 든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 속에 묻혀 진상규명을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송경동 시인, 선동하지 마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