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 없는 손이 탁자에 놓여 있다. 할 일을 다 잊은 다섯 손가락이 달려 있다. 손에서 갈라져 나온 손가락처럼 뭔가를 쥐려 하고 있다. 뭔가를 달라고 하는 것 같다. 손가락마다 구부리거나 쥐었던 마디가 있다. 습관이 만든 주름이 있다. 주름 사이에서 몰래 자라오다가 지금 막 들킨 것 같은 손금이 있다. 지워진 지문이 기억을 되찾아 재생될 것 같다. 털과 손톱도 가죽 깊이 숨어서 나올 기회를 틈틈이 엿보고 있는지 모른다. 피도 체온도 없이 손이 탁자에 놓여 있다. 빈 가죽 안으로 들어간 어둠이 다섯 손가락으로 갈라지고 또 갈라지고 있다. 김기택(1957~) 시인은 탁자에 놓여 있는 가죽 장갑을 보고 있다. 장갑을 살펴보는 시인의 눈은 집요하다. 탁자와 장갑이 있는 공간이나 풍경에는 관심조차 없다. 감정을 배..
미아보호소에서 데려온 4년 만의 휴가라는 녀석이 이불을 당겨 덮으면 나도 잠시 마음을 놓고 창틀에 와 닿는 가을비 소리에 귀 기울입니다 도시 가득 기계들이 계속 돌아가고 어머니는 프라이팬에 돼지비계를 얹어 기름을 내고 이 순간에도 타인의 손이 가동됩니다 나는 휴가라는 녀석과 놀아주는 방법을 오래전에 잊어버려서 휴가를 깨우지 못한 채 누워 있고 녀석이 일어나면 돼지기름에 바짝 볶은 짜장 소스로 밥을 비벼 늦은 아침을 먹으려 합니다 비가 내리고 있어도 가루세제처럼 살갗이 까슬한 시간 동료의 손이 가동됩니다 신의 정밀한 기계처럼 지구가 오차 없이 돌아갑니다 지구의 얼굴 반쪽은 늘 검은 기름이 묻어 있습니다 조금 떨어진 곳엔 손바닥 붉은 목장갑처럼 달이 떠 있습니다 한 손에 달을 낀 지구가 작업을 계속합니다 최..
고양이가 태어난 게 분명하다 고양이가 울었으니까 소리로만 짐작할 뿐이지만 귀는 벽이 되어 있어 내 귀는 꽈리처럼 쪼그라들어 고양이를 가둬 놓는다 언제나 이맘때면 되돌아오는 그런 날이 있다 녹아 버려서 울음이 될지도 모르는 날들 마른 울음 한번 터트리지 못한 첫아이는 물컹 내 속을 빠져나갔다 매일매일 울음은 저녁 무렵을 통과했다 벽을 사이에 두고 고양이 소리가 더 큰 벽을 만들어 지붕을 씌운다 귀를 기울일수록 벽이 있었으니까 꼬리가 사르르 사라질 때까지 내가 태어나고 있었다 정정화(1973~) 몸이 아파 외출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자연스레 소리에 민감해진다. 기억을 되살리거나 소리에 집중해도 가로막힌 벽 때문에 밖의 변화를 알아차리는 데는 한계가 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창문. 그 좁은 ..
육교에서 코트가 놓아 버린 단추를 보았다 시멘트에 박혀 눈뜨고 있었다 단추는 몸을 열고 닫는 한곳을 고수하던 자랑이었다 옷을 완성시키는 손끝이었다 실이 낡아 갈 때 단추도 닳아 가고 어디로든 가겠냐고 실밥이 물으면 어디로든 가겠다고 호기를 부렸다 이제 태양 발바닥의 무게를 받아 내고 있었다 생의 이변처럼 음해의 그림자가 덮친 날이었다 대면과 대피 사이 손은 단추를 만지작거렸다 매달려 땅을 굽어보던 실밥의 위태함은 가젤이 치타에 쫓기는 거리였을까 망설이는 내가 미워져 단추는 그날 실밥을 놓아 버린 걸까 단추가 나의 위태함을 본 날이다 덜렁거리는 생을 꿰매지 않은 나를, 시절 모르고 피는 가을 철쭉처럼 무작정 생에 끼어든 자라고 읽은 날이다 이제 나의 단추여 안녕! 정영선(1949~ ) 육교 위에 단추 하나..
뒷모습 없는 다정은 당신이 잘한다 늦저녁에도 불빛으로 환한 이곳에서 예전에는 다 논하고 밭뿐이었다고 당신에게 일렀다던 당신의 어머니를 생각하면 저절로 당신의 아버지 또 할머니와 할아버지 당신하고 성씨를 같이 써서 다정한 얼굴들 명절날 모처럼 벅적이는 가정집이 떠오르고 초승달을 마저 가리는 사람을 끝까지 보며 사람의 앞모습 하나로 감지되는 세상을 입으로 사랑한다 말한 사람을 내가 정말로 사랑하게 된 타향의 밤에 딱 하나 켜지는 가정집 불빛은 이제야 막 들어왔다는 것 전욱진(1993~) 이 시는 따뜻하고 다정한 듯하지만 어딘지 쓸쓸하다. 가난하지만 단란한 가정의 삶을 먹먹하게 그리고 있다. 타향인 안양에 정착하느라, 가족을 부양하느라 애쓰는 당신의 고단함이 느껴진다. 늦은 귀가에 늘 입으로만 “사랑한다”는 ..
동쪽 하늘에서만 본 사람은 서쪽 하늘 새벽 보름달 모른다 마음에 상처 지우는 것이 병 앓는 것과 같다는 것 모르듯 그러나 우리 숲으로 가면 꽁지 들썩이며 새소리 내듯 화관 쓴 신부가 되어 도둑처럼 찾아오는 밤 맞이할 수 있다 둥실 보름달 내리는 이불 휘감고 바람도 깃 다듬어 숨죽이는 해독할 수 없는 세상으로 들어가 새벽달 보며 하루 여는 것이다 박소영(1955~) 우리는 동쪽에서 떠오르거나 허공에 떠 있는 달은 종종 보지만, 서쪽으로 지는 달은 거의 못 보고 산다. 그 시간에 잠을 자거나 달이 일찍 지기 때문이다. 달은 한 달 주기로 그믐에서 보름, 다시 그믐으로 모양을 달리한다. 우리가 보는 달은 똑같은 면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달의 앞뒷면을 다 보는 양 착각한다. 사람을 대하는 것도 마찬가지. 한쪽 ..
짓밟힌 잔디처럼 누워 있던 목소리가 이곳저곳으로 번져가고 있다 말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끝내 털어놓게 되는 이야기들 여름의 잡초처럼 녹색으로 물들던 상처들 점점 번져가다 파도가 된다 덮쳐오는 슬픔과 밀려드는 과거 사이에서 파도는 한 자락씩 푸른 늑대가 되어 밤하늘을 날아다닌다 홀로 서 있던 빨간 등대가 늑대들에게 깜빡깜빡 신호를 보내면 우거진 여름 안에서 구불구불 날아드는 늑대들 숨기면 숨길수록 더 또렷해지는 불안이 보름달처럼 높이 떠오르고 우울이 거대한 혹등고래를 타고 천천히 떠 내려온다 계속해서 덮쳐오는 해일과 파도 속에서 이야기는 뼈만 앙상하게 남았네 숨겨오던 불온한 상처들에 대해서 한 번쯤은 온전히 이해받고 싶었지 잠잠히 듣고 있던 당신의 동공 속에서 슬픔이 망각의 비로 흘러내린다 잔디와 파도와 늑..
서쪽으로 머리를 두고 서쪽을 오래 본다 절반도 쓰지 못한 하루가 사라지는 곳 고요한 감전의 이야기가 고여 있는 곳 한 생의 꽃이 피고 기우는 곳 스무 살의 여우비와 거짓말 같은 사람들도 그곳에서 왔고, 갔다 누워서 똥을 싸는 꿈을 꿨는데 서쪽은 부끄럽지 않았다 같은 방향으로 날아가는 새들과 바람이 어디쯤에서 쉬어 가는지 알 수 없지만 내가 심지 않은 풀에서도 서쪽 냄새가 가득했다 이채민(1958~) 시인은 지난해 여름, 코로나19 백신을 맞고 죽음을 껴안았던 7일간의 기록을 시 ‘백신 보고서’로 남겼다. 백신을 맞고 30분 후 몸을 가눌 수 없을 만큼 휘청거렸고, 바로 응급실로 들어가 의식을 잃었다. 응급처치를 받아 겨우 고비를 넘긴 시인은 입원 나흘째 퇴원했지만, 다시 열이 오르고 심장이 두근거려 종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