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싱한 새벽하늘을 데리고 의사가 분만실로 들어간다 팽팽한 대기 팽팽한 지평선 차디찬 적막이 흐르고 적막이 흐르고 눈 덮인 들판 끝으로 먹물처럼 퍼지는 여인의 외마디 비명 놀란 새가 푸드덕 허공에 희디흰 칼금을 긋는다 하늘의 회음부가 예리하게 절개되고 아기 울음 터진다 사방으로 빛이 터진다 눈 뜨는 돌 눈 뜨는 대지샘물이 걷기 시작한다 함기석(1966~ ) 탄생은 ‘없는 상태’에서 새로 생겨나는 것이지만, 일출은 ‘있는 상태’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해돋이’라 하지만 실상은 태양이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항상 그 자리에 있는 태양 주위를 도는 지구의 자전에 의한 자연현상이다. 일출은 주객이 전도된 말인 셈이다. 시에선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일출을 아기의 탄생에 비유한 이 시도 마찬가지다. 동트기 ..
새 한 마리 날아와 눈 위에 앉는다 보이지 않는 먹이를 찾겠다고 눈 위에 찍어놓은 소소소수수수 발자국 여럿 금세 녹아 사라질 발자국만 남기고 새는 날아간다 이 아침 나의 할 일은 떠난 새의 발자국을 붙드는 일이다 이용진(1966~) 등단 26년 만에 낸 첫 시집이다. 시집 맨 앞에 수록한 시 ‘관상’에서 “새 한 마리 물가에 날아와 제 낯을 비춰본다”며 “평생 날아도 다 날지 못할 허공은 그대로인데// 아직 할 일이 남”아 다행이라 했다. 시 ‘과제’는 맨 뒤에 실려 있다. 한때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시인으로 활동했으나 오래 침묵할 수밖에 없었음을 드러낸 의도적 배치다. 흘러간 세월보다 시인으로 살 날이 더 많음을, ‘물가’와 ‘눈 위’에 날아와 앉은 “새 한 마리”를 통해 심경을 토로하고 있다. 당연히..
폭설이다. 하루 종일 눈이 내려 집으로 가는 길이 지워졌다. 눈을 감아도 환한 저 길 끝 아랫목에서 굽은 허리를 지지실 어머니 뒤척일 때마다 풀풀, 시름이 날릴 테지만 어둑해질 무렵이면 그림자처럼 일어나 홀로 팥죽을 끓이실 게다. 숭얼숭얼 죽 끓는 소리 긴 겨울밤들을 건너가는 주문이리라. 너무 낮고 아득해서 내 얇은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눈그늘처럼 흐릿해서 들여다볼 수 없다. 신덕룡(1956~) 해종일 눈 내리면 세상의 경계가 지워졌다. 논과 밭, 산은 흰 물감을 통째 들이부은 듯했다. 그나마 양쪽에 나란히 서 있는 미루나무가 신작로임을 알려줬다. 아무리 마당과 골목을 쓸어도 쌓이는 눈을 감당할 수 없었지만, 너무 쌓이면 치우기 힘들어 수시로 눈을 치웠다. 폭설이 내리는 날이면 이른 저녁부터 연기가 피..
설악, 겨울 골짝을 걷다 찔레 덧가지를 얻었습니다 별빛에 얼어 낮달에 녹고 눈발에 얼어 저녁놀에 녹으며 풍경을 넘는 붉은 발가락, 억년을 걸었는지 뜨겁습니다 찾아오는 바람인 듯 돌아가는 꿈길인 듯 만해사에 드니 왕말벌 한마리 죽어 법당을 무덤으로 삼고 적막합니다 찔레, 말벌을 만나러 오던 먼먼 눈빛인지 약속이었는지 찬란한 그물에 걸리는 향기, 염주알로 익었습니다 서로에게 한짝 신발이었을 생, 고맙습니다 참 붉습니다 김수우(1959~) 강원 인제 내린천변에 있는 만해마을에 몇 번 갔다. 새벽에 일어나 안개 자욱한 천변을 걷기도 하고, 흐르는 찬물에 발을 담그기도 했다. 만해축전에 참가했을 땐 법고 두드리는 스님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기도 했다. 속세의 허물 다 벗어버리라 호통치는 듯한 법고 소리에 정신이 ..
손잡이 뜯긴 장롱은 하루 만에 치워졌는데 거울은 며칠째 제자리다 빈집처럼 작은 발자국들은 얼어 있고 표정은 닳아 없어진 겨울 골목 착하게 살다 가장자리로 나선 거울은 어떤 궁리를 하고 있을까 외롭고 치명적인 몇 장의 구름과 두 겹의 생처럼 핀 십이월 함박눈 몇 장이 얼굴을 들이민다 도무지 닿지 않는다 김병호(1971~) 아파트 앞 언덕에 고만고만한 집들이 모여 있었다. 재개발지구로 지정된 후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갔다. 빈집 대문에는 붉고 흉한 X자가 그려져 있었다. 침범하면 어디선가 몽둥이를 들고 나타날 것 같았다. 버리고 간 세간이 골목에 나뒹굴었다. 밤이면 음산하게 고양이 울음이 들려왔다. 주인 없는 집들이 몽땅 헐리고, 언덕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니 언덕 밑에 잠들어 있던 흙의 속살까지 파헤쳤..
나비는 날개가 무거워 바위에 쉬어 앉았다 평생 꿀 따던 꽃대궁처럼 어지럽지 않았다 등판에 밴 땀내도 싫지 않았다 달팽이 껍질에 무서리 솟던 날 마지막 빈 꽃 듣던 바로 그 다음날 바람은 낙엽인 줄 알고 나비의 어깨를 걷어 갔다 나비의 몸은 삭은 부엽에 떨어져 제 주위의 지층을 오래 아주 오래 굳혀갔고 바위는 느리게 아주 느리게 제 몸을 헐어 가벼워졌다 지금 저 바위는 그 나비다 지금 저 나비는 그 바위다 봐라, 나비 위에 갓 깬 바위가 앉아 쉬고 있다 반칠환(1964~) 이 시를 대하는 순간 앨범 하나가 떠올랐다. 1988년 발매된 그룹 동서남북의 다. ‘아주 오래된’이나 ‘나비’ ‘바위’ 등의 시어로 인한 자연스러운 연상작용이겠지만 기억의 저편에 고이 잠들어 있던 노래들이 한순간에 되살아났다. 참 좋아..
바람이 잠자리 날개 위에서 잠시 쉬어갈 때에도 제 몸을 키우며 목청을 가다듬던 계절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온기 없는 이불을 잡아당기며 눈뜨는 어느 날처럼 이승과 저승의 경계 같기도 한 풍경이 눈발 앞에서 어리둥절한데 심술 난 생의 날카로운 모서리에 수백 번쯤 찔려 세상에 거꾸로 서 있는 듯 절뚝거려도 가끔, 환한 눈물의 어디쯤 닿을 수도 있는 거라고 그러면 됐다고 애달픈 얼굴들 서로의 심장을 뜨겁게 포개는 중일까 무뎌지지 않는 시간의 흔적을 더듬는 일조차 아름다운 고행이어서 몸보다 먼저 눈발을 껴안은 마음이 손가락 끝에 닿을 것 같은 허공 속으로 자꾸만 파고들었다 김밝은(1964~) 첫눈이 오면 만나자는 약속을 한 적 있다. 아득히 먼일인지라 누구와 어디서 만나기로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약속한..
썩 나쁜 일은 아닐 거야 구름의 지도를 그리고 꽃이 피는 속도를 알았으니까 정확히 몇 시에 대추나무가 가장 곧게 서는지도 알게 됐으니까 내가 무엇이 될 수 없는지, 내 꿈은 왜 자꾸 무너지는지 생각하다가 뒤늦은 질투에 부끄러워지는 일 봄볕 같은 감정들을 혼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알겠어 이운진(1971~) 주변에 조언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고등학교에 가지 못해 방황하다가 검정고시를 시작할 때도, 대학과 전공을 선택할 때도, 시인의 길을 가겠다 결심할 때도 의논할 사람이 없었다. 혼자 선택하고, 혼자 결정해야만 했다. 가난이 동행한 힘든 시절이었다. 외롭고 막막했지만, 그만큼 성장할 수 있었다. 덕분에 누군가에게 기대지 않았고, 어려운 일이 닥쳐도 좌절하지 않고 잘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되돌아보면 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