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나서는 아들에게 보람찬 하루라고 말했다 창밖은 봄볕이 묽도록 맑고 그 속으로 피어오르는 삼월처럼 흔들리며 가물거리며 멀어지는 젊음에 대고 아니다 아니다 후회했다 매일이 보람차다면 힘겨워 살 수 있나 행복도 무거워질 때 있으니 맹물 마시듯 의미 없는 날도 있어야지 잘 살려고 애쓰지 않는 날도 있어야지 심재휘(1963~ ) “힘내세요!” 전에는 힘들어하는 사람을 보면 위로하며 건네던 말이지만 힘내라는 말보다 힘을 달라는 반응 이후엔 꺼리게 됐다. 때로 한마디 말이 많은 위로가 되지만 절박한, 특히 경제적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이 말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진심을 담은 말도 받아들이는 사람의 상황이나 마음에 따라 왜곡될 수 있다. 시인은 외출하는 아들에게 무심코 “보람찬 하루”라는 말을 건네곤 후회한다..
먼지처럼 쌓이는 말들을 털어 내고 싶었다 시부모 때문에, 남편 때문에 불쑥불쑥, 시루 속 콩나물처럼 올라오는 말들을 거미줄 치듯 집 안 곳곳에 걸어 두곤 하였다 하고 싶은 말 혀 안쪽으로 밀어 넣고 이빨과 이빨 사이 틈을 야물게 단도리하곤 하였다 이말산 산자락 근방 카페 창가에 앉아 나만을 위하여 브런치 세트를 주문한다 해종일 하늘을 보다가 빽빽이 들어찬 허공의 고요를 보다가 인체 혈관 3D 사진 같은 한 그루 나무를 보다가 우듬지로 올라간 빈 둥지를 보다가 빈 둥지 같다는 생각을 들여다보다가 카페에 여자를 벗어놓고 집으로 돌아와 아내와 어머니로 갈아입는다 허향숙(1965~) 구전가요 ‘시집살이’에 “귀먹어서 삼 년이요 눈 어두워 삼 년이요”란 가사가 나온다. 시집을 가면 듣고도 못 들은 척, 보고도 못..
저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다짐했다 얼굴도 없이 뼈도 없이 맹물에도 풀리면서 더러운 것이나 훔치는 생을 살지는 않겠다고 생각했다 하늘만 바라보면서 고고했던 의지를 꺾은 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 무엇이든 맞서 싸우되 한 뼘 땅에 만족했던 우직함이 나를 쓰러뜨렸다 나무는 벌거벗어도 실체가 없음의 다른 말이다 벌거벗어도 보일 것이 없으니 부끄럽지 않다 당신이 나를 가슴에 품지 않고 쓰레기통에 넣는다 해도 잠시라도 나를 필요로 할 때 기꺼이 나는 휴지가 되기로 한다 나는 당당한 나무의 후생이다 나호열(1953~) 나무로 만들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연필, 의자, 책상…. 연필은 글씨를 쓰는데, 의자는 궁둥이를 대고 앉는데, 책상은 주로 글을 읽거나 쓸 때 사용한다. 저마다 생김새는 다르지만 쓰임이 있다. ..
수풀에 있었다. 가장 낮은 곳에서 숱한 위험을 만났다. 혐오스러웠고 추했다. 돈과 권세가 있으면 죄가 없단다. 늘 죄인으로 살아야 하는 수풀. 악인들의 말로에 대해. 저 높은 단상의 말로에 대해 어지러운 소문들만 들어야 한다. 수풀은 파괴되지 않는다. 이곳에 오래 있으면 더러운 짐승이 된다. 수풀 속에서 다리를 감싸안고 울었다. 풀잎들이 흔들렸다. 풀잎에 빗방울이 간신히 붙어 있다. 빗방울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곧 흘러내려 사라졌다. 새로운 빗방울이 또 고인다. 퍼도 퍼도 마르지 않는 이 질긴 운명. 피를 머금고 있는 빗방울. 수풀에 있었다. 아침햇살까지 야속한 수풀에 있었다. 금방 고이다 사라지는 수풀에 있었다. 거짓말이 수풀에 가득했다. 이재훈(1972~) 100m 달리기 시합을 하는데 출발선상에 육..
나는 밤의 현관에 서 있는 사람 현관에 고인 찬바람 속의 사람 한 발은 안에 한 발은 밖에 가물가물 걸치고 가만히 서서 발에 물집이 잡히는 사람 고개 든 채 잠든 오령의 멧누에 꿈속처럼 무릎 없이 변모를 기다리는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강기원(1957~) 출입구와 실내 사이에 있는 현관은 묘한 공간이다. 건물 내부지만 온전히 안이라 하기엔 조금 애매하다. 현관은 건물의 규모에 따라 크거나 좁고, 화려하거나 수수하다. 아예 없기도 한데, 이때 둘 데가 마땅찮은 것이 신발이다. 현관의 주인은 신발이다. 신발은 사람과 땅의 직접적인 대면을 막아준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들어옴으로써 더러운 것들이 집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방지한다. 현관은 외부와 내부의 경계, 외출과 귀가의 반복적인 변화를 상징한다. 이 ..
설원을 달렸다 숨이 몸보다 커질 때까지 숨만 쉬어도 지구 반대편 사람을 만날 수 있어 그렇게 말하는 너를 보는 게 좋았다 여기 너무 아름답다 우리 꼭 다시 오자 겨울 별자리가 가고 여름 별자리가 올 때까지 녹지 않는 것이 있었다 박은지(1985~ ) 어떤 말은 미안해서, 어떤 말은 부끄러워서, 어떤 말은 불편해서, 어떤 말은 너무 늦어버려서 할 수가 없다. 가까운 사이라 더 속말을 꺼내놓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차라리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다시는 만나지 않을 사람에게 풀어놓는 게 편할 수도 있다. 선의로 한 말을 왜곡해서 받아들여 관계가 틀어지기도 한다. 감정이 섞인 말에는 가시가 돋아 있다. 그 가시를 삼키면 내가 다치고, 내뱉으면 상대가 다친다. 못다 한 말이 쌓여 몸과 마음을 아프게 한다. 약속..
여자가 쉐타를 푼다 남자의 뺨을 때리던 오른쪽 팔이 없어졌다 구경하던 왼쪽 팔이 없어졌다 잠시 여자가 손을 멈추고 인공눈물을 넣는다 다시 목을 푼다 목을 꺾듯 아직도 붉은 꽃을 가슴에서 풀어낸다 꽃이 사라지자 가슴도 사라졌다 마라톤 선수처럼 여자가 달린다 여자를 따라 빙빙 털실이 달린다 트랙을 수백 바퀴 돌아도 여자의 눈물을 훔쳐 간 도둑을 잡을 수가 없다 털실 뭉치가 자꾸 커진다 남자를 다 풀어낸 여자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다시 눈물을 넣는다 아무도 여자가 운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화은(1947~) 사랑하는 사람이 곁을 떠났다. 구체적인 정황은 알 수 없지만, 여자가 남자의 뺨을 때린 것으로 보아 이별의 원인이 ‘남자의 배신’이라 생각해도 무방하다. 사랑하다가 헤어지는 건 흔한 일이지만, 남자의 “목을 ..
바위에서 긁어낸 이끼들로 배를 채운다 그럴 때마다 바위에 아주 작은 상처를 입힌다 최소한의 양분으로도 살 수 있게 되고 창자는 점점 단순해지고 저 바위는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 허기진 손톱들에 의해 나희덕(1966~) 시인은 ‘이끼’라는 시에서 “닳아지는 살 대신/ 그가 입혀주고 떠나간// 푸른 옷 한 벌”인 이끼를 “분노와 사랑의 흔적”이라 했다. 무심한 듯 흐르는 물이 남겨놓고 간 이끼는 분노를 삭여주고 사랑의 상처도 감싸준다. 물의 위로에 닳은 마음도 치유된다. 물에 의해 생겨났지만, 물과 함께 흘러가지 못한 이끼는 한곳에 정체한다. 물이 세월이라면 이끼는 흘러가지 못한 마음이다. 25년쯤 지나 시인은 흐르는 물의 이끼 대신 한곳에 붙박인 바위의 이끼를 소환한다. 이끼는 상처를 가려주는 옷에서 배고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