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피기도 전에 물든다 길과 들판이 노랑 빨강으로 물들고 자주색 연분홍으로 물든다 저 푸른 꽃대 어떻게 붉고 노란 마음을 퍼올렸을까 울면서 거리를 걷는 꽃의 마음 하나쯤 헤아렸다면 나도 낮과 밤의 경계도 없이 흔들렸겠지 그대 눈길 하나만 던져준다면 저녁노을에 놀란 나는 어둠 속에서 퍼올린 물빛으로 시들어가는 꽃의 행적을 필사했을 것이다 이성수(1964~) 시인의 생각에 자연은 거대한 염색 장인이다. 겨울 지나 봄이 오면 “길과 들판”에 각양각색의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는데, 이는 그냥 피는 게 아니라 자연이 여러 빛깔로 물들이는 것이다. 물들인다는 것은 빛깔이 옮아서 묻거나 스미게 한다는 말이다. 고유한 빛깔의 수분을 빨아들여 옮겨진 빛깔을 ‘물’이라 하는데, 천연염색이나 실수로 옷에 진 얼룩도 이에 해..
죽어야 겨우 그 죽음만큼의 다리가 생긴다 다짐은 스스로에게 놓은 징검다리 같은 것 다짐이 희미해질 즈음 가슴속에 품은 돌덩이 하나씩 내려놓고 딛고 가는 게 인생인지 모른다 놓은 돌들이 하늘로 날아 올라가고 되돌아온다 걷고 또 걸어 도착한 곧고 외로운 자신만의 길 거짓말처럼 생은 한순간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김완(1957~) 이 시는 좀 느닷없다. 밑도 끝도 없이 “죽어야 겨우 그 죽음만큼의 다리가 생긴다”고 선언한다. 이는 개울이나 계곡에 띄엄띄엄 돌을 놓아 건널 수 있는 징검다리가 아니라 삶에서 죽음 이후 보이지 않는 길에 놓인 ‘존재의 다리’라는 뜻이다. 생의 순간마다 많은 다짐을 하면서 생겨난 징검돌을 “다짐이 희미해질 즈음” 하나씩 내려놓는다. “가슴속에 품은 돌덩이”는 욕망이나 책임, 자책 같..
봄비 그치자 아침 이내 포근포근 산자락을 감아돈다. 느른하고 불안하다. 이런 날이면 천산 누옥(漏屋)의 우리 어머니, 육탈의 가벼운 몸 또 근질근질하실 게다. 천명(天命)도 아랑곳없이 떨쳐 일어나 요정처럼 날래게 묵정밭을 일구실 게다. 어허, 저기. 천산에서 뜯어 흩뿌리는 모정(母情)이 무지개 되어 훨훨 땅바닥에 날아내린다. 눈이 부셔 차마 바라볼 수가 없다. 너무 환해서 비릿한 눈물 번진다. 정우영(1960~) 봄비가 내려 온갖 곡식을 기름지게 한다는 곡우(穀雨). 이 무렵 내리는 비는 생명을 움트게 한다. 잠자던 곡물은 깨어나고, 나무는 몸에 물을 가득 채워 싹을 틔운다. 농부는 볍씨를 물에 담그고 못자리를 준비한다. 한 해 농사의 시작이다. 봄비 그친 아침, 앞산에 푸르스름하고 흐릿한 기운이 감돌자..
우리에게 사랑은 새를 기르는 일보다 어려웠다 꿈 바깥에서도 너는 늘 나무라 적고 발음한 후 정말 그것으로 자라는 듯했다 그런 너를 보고 있으니 어쩐지 나도 온전히 숲을 이루거나 그 아래 수목장 된 것 같았다 매일 꿈마다 너와 누워 있는 장례였다 시들지 않은 손들이 묵묵히 얼굴을 쓸어가고 있었다 부수다 만 유리온실처럼 여전히 살갗이 눈부시고 따사로웠다 돌아누운 등을 끌어안고서 아직은 아무 일도 피어나지 않을 거라 말해주었다 최백규(1992~) 젊은 사람이나 나이 많은 사람이나 사랑은 어렵다. 서로 합의한 사랑도, 일방적인 사랑도 어렵긴 마찬가지다. 혼자 애태우다 끝내 고백조차 못해본 사랑은 평생 마음 한쪽이 쓰라리다. 냉가슴 앓다 어렵게 용기를 냈다가 거절의 쓰라림을 맛보기도 한다. 상대가 고백을 받아들여..
새벽의 고요가 광목천을 감싸고 있다 희뿌연 휘장에 둘러싸인 형상은 아직 잠을 깨기 전이어서 누구도 섣불리 손댈 수가 없다 눈을 부릅뜨고 있거나 찡그린 미간이거나, 목에 얹힌 얼굴이 두렵기만 하다 깊고 어두운 창고 같고 박물관 지하의 수장고 같은데, 새벽은 오후 2시의 제막식을 향하여 길을 떠났다 저의 숨결은커녕 죽음조차 느낄 수 없는 데스마스크, 얼굴 표정 하나로 일생을 요약하고 있다 안면 근육의 무수한 균열을 입에 문 채 이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정말 그러하다는 듯이 오정국(1956~) 한 사진 전시회에 갔다가 얼굴을 클로즈업한 흑백 사진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한동안 바라보았다. 깊은 주름과 눈동자는 그가 겪은 삶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표정 하나로/ 일생을 요약하고 있”었는데, 왠지 내가 사진 ..
화상 입은 손가락을 싸매고 물을 멀리하지만 상처가 자꾸 여린 속살을 게워낸다 할 말 다 하겠다고 대드는 사람처럼 막무가내다 속살은 밖으로 나와 다시 살갗이 될 테지만 손가락은 그때까지 저 혼자 견디면서 제풀에 지쳐 입 다물 것이다 불이 지나간 흔적을 조금씩 삼키면서 살갗 두꺼워지고 주름 깊어질 것이다 저 통증의 깊이에 아무것도 보탤 수 없는 나는 마침내 손가락까지 뻔뻔한 몸을 갖게 되리라 선지자처럼 물 위를 걷는 소금쟁이에게 절대로 저를 열어주지 않는 물의 침묵을 이해할 수 있다면 제 살을 꺼내 다시 저를 싸매는 것들을 거룩하다고 부를 수 있겠다 박미라(1952~) 손가락에 화상을 입은 사람이 있다. 자신의 실수가 아니라 “할 말 다 하겠다고 대드는 사람”과 실랑이를 하다가 다쳤다. 싸우기 싫다고 피해도..
본디 구름은 침술에 밝아 빗소리만으로도 꽃을 일으키는데 오늘은 흐린 침통에서 햇빛 한 가닥 꺼내들더니 꽃무릇에 금침을 놓는다 무형무통(無形無痛)한 구름의 침술은 대대로 내려오는 향긋한 비방 백회로 들어가 괸 그늘 풀어주는 산 채로 죽은 곳에 이르는 일침 꽃봉오리 하나 달이는데 먼 별과 행성이 눈 맞추고 있다 그 아득한 손길을 지나 바위 한 채 열고 나오는 산꽃 하나 박지웅(1969~ ) 피할 곳 없는 벌판에서 느닷없이 쏟아지는 소낙비를 맞아본 적 있다. 본능적으로 머리를 감싼 손이 따가웠다. 한바탕 쏟아낸 하늘이 언제 그랬냐는 듯 개었다. 먹장구름이 물러가자 다시 햇빛이 내리쬐었다. 여름 한낮의 햇볕도 따가웠다. 그래도 금방 옷이 말랐고, 소낙비와 햇볕의 침을 맞은 듯 몸이 개운했다. 시인도 그런 경험이..
장독대 속 묵은 김치를 죽죽 찢어 빨아 본다 여물어 터질 것 같은 여름이 섰는 포도원의 알을 깨물어 본다 봉숭아 물들인 손톱 그 안에 갇혀 있는 달 한 조각을 새벽 다섯 시 아직 깨지 않은 하늘을 야윈 그림자 비친 우물물 한 모금을 들이켜 본다 어떤 암흑 속에서도 결코 신으로부터 구원받지 않겠어, 그걸 유일한 자부심으로 삼는 시인들이 우주 밥상에 그득하다 김안녕(1976~) 시인은 세 번째 시집 을 내면서 김은경에서 김안녕으로 이름을 갈아입었다. “안녕”이라는 인사말은 만남과 이별의 속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김은경으로 쓴 시가 ‘겉절이’라면 김안녕으로 쓰는 시는 ‘묵은 김치’라는 뜻일까. 잘 익은 김치는 입에 넣는 순간 톡 쏘는 신맛이 강하다. 사실 김장김치는 장독대보다 땅속이 어울린다. 땅속에 묻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