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어린이날이었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해제되면서 오랜만에 가족들과 밖에서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치고 개인적으로 인근에 볼일이 있어 홀로 횡단보도 쪽을 향하던 중 어느 비영리기구의 직원과 맞닥뜨렸다. 30대로 보이는 그 남성 직원은 미혼모들이 낳은 아이들을 돕기 위해 어린이날 거리에 나왔다며 “한 달 2만원, 하루 700원 커피 한 잔 값도 안 되는 돈으로 아이들을 도울 수 있다”며 당장 정기후원 신청서를 작성해 줄 것을 요청했다. 가계운영에 부담되는 금액도 아니고, 기부가 남을 돕는 일을 넘어 개인의 삶을 충만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반대할 이유는 없었지만 문제는 타이밍이었다. 다른 볼일이 급했던 터라 “해당 홈페이지를 통해 알아보고 추후 결정하겠다”고 했으나 직원은 막무가내였다. “나중에 하겠다는 분..
한번 건너오면 돌아갈 수 없는 세계가 있다. 오랫동안 ‘세월’이란 말을 쓰지 못했다. ‘골든타임’이란 단어도 다른 표현을 찾아야 했다. 어떤 말을 특정 사건이 독점할 순 없지만, 단어에 달라붙은 경험과 기억은 언어생활을 바꿔놓았다. 언젠가 세월이라는 말도, 골든타임이라는 말도 아무렇지 않게 쓸 날이 올까. 그렇게 된다면 무던해진 스스로를 조금 미워하게 될 것 같다. 벌써 잊었냐고. 많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지나치는 지하철역사도 어떤 이들에겐 공포스러운 공간이자 투쟁의 대상이다. 2001년 4호선 오이도역에서 장애인 부부가 리프트 사고로 숨졌다. 지난 4월에도 9호선 양천향교역에서 한 장애인이 비슷한 이유로 목숨을 잃었다. 20년이 지나 서울지하철이 9호선까지 만들어지는 동안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지하철을..
지난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는 토트넘 손흥민의 한 영상이 화제를 모으며 팬들 사이에 공유됐다. 골을 넣는 게 아니었다. 시즌 최종 홈경기를 마친 뒤 팬 서비스를 하는 내용이었다. 손흥민은 그라운드에서 지인, 어린이들과 사진을 찍었다. 관중석에 있는 팬들과 악수하며 사인도 해줬다. 그렇게 보낸 시간은 5분. 손흥민 얼굴은 밝았다. 팬이 있기에 자신도 존재함을 아는 표정이었다. 손흥민은 축구를 철저하게 팀 종목으로 대했다. 자신이 골을 넣기보다 팀이 이기는 걸 바랐다. 공격수로서 수비도 열심히 했고 동료를 항상 도왔다. 토트넘 안토니오 콘테 감독은 최근 ‘득점왕 경쟁 중인 손흥민에게 PK를 맡길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에 “PK는 케인이 찬다”며 “개인 목표보다 팀 목표가 우선이라는 걸 손흥민도 안다”..
A씨는 지난해 1월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코로나19 유전자증폭(PCR) 검사를 했다. A씨가 지금껏 모은 음성확인서는 60여장. A씨는 밥을 먹고 물을 마시기 위해 음성확인서가 필요했다. 기본권 침해라는 비판이 거셌던 ‘방역패스’(코로나19 접종증명·음성확인제)가 A씨에겐 1년 넘게 적용됐던 셈이다. A씨는 노숙인이다. 경향신문 ‘K방역에 가려진 사람들’ 기획 시리즈 3회(5월5일자 8면)에 실린 내용이다. A씨는 음성확인서 종이 뭉치를 코로나19 대유행 속 “나의 역사”라고 했다. A씨를 인터뷰한 민서영 기자는 이를 두고 “차별의 역사”라고 썼다. 방역당국은 노숙인, 이주노동자 등 집단생활을 하는 이들 중 감염자가 나오면 시설 이용자 전체에게 선제검사를 명령했다. 이 조치로 누군가 끼니를 거르고, 누군..
미국 마이크로소프트(MS)가 지난달 PC 운영체제인 윈도 11에서 화상회의 시 실시간 자막을 제공하기로 했다. 또 일정한 시간 동안 e메일, 메시지 등 알림이 울리지 않고 업무에 집중할 수 있는 ‘방해 금지’ 모드도 추가했다. 둘 다 업무 중 유용하게 쓰일 만한 기능들이다. 이 기능들은 모두 장애를 가진 MS 직원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실시간 자막은 화상회의에서 소외감을 느꼈던 청각장애인 매니저가 개발했고, 방해 금지 모드는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가 있는 직원이 ‘알림이 너무 많아 일에 집중할 수 없다’고 호소하면서 만들게 됐다. 미국의 정보기술(IT) 기업에선 이렇게 장애인이 본사의 제품과 서비스 담당자로 일하면서 접근성 개선에 나서는 일이 흔하다. 예를 들어 애플 아이폰의 기능 중 이미지..
지난해 출범한 미국 조 바이든 내각은 여러모로 화제를 모으기에 충분했다. 여성이 무려 46%에 달했고, 인종별로는 백인 50%, 흑인 23.1%, 라틴계 15.4%, 아시아계가 11.5%나 됐기 때문이다. 최초라는 타이틀이 붙은 장관들도 여럿 포진했다. 첫 여성 재무장관인 재닛 옐런, 첫 흑인 국방장관인 로이드 오스틴, 첫 커밍아웃 장관인 피트 부티지지 교통부 장관, 첫 인디언 장관인 데브 할랜드 내무부 장관 등이 대표적이다. 지난해 말 이민자인 루시 고가 한국계 여성으로선 처음으로 미 연방고법 판사에 인준됐고, 이달 초에는 미 연방대법원 233년 역사상 첫 흑인 여성 대법관이 탄생하는 등 사법계도 연일 파격의 인사를 보여주고 있다. 반면 우리는 어떠한가.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첫 내각을 보면 국무총리..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해 7월 미국프로풋볼(NFL) 탬파베이 버커니어스를 백악관으로 초청했다. NFL 우승팀이 초청받아 백악관을 방문한 것은 2017년 이후 4년 만이다. 바이든은 지난해 11월에는 미국프로농구(NBA) 챔피언 밀워키 벅스도 백악관으로 불렀다. 밀워키 선수단은 바이든 이름과 46이 새겨진 유니폼을 선물했다. 바이든은 제46대 대통령이다. 바이든은 앞선 8월 미국여자프로농구(WNBA) 우승팀 시애틀 스톰도 백악관으로 초대했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농구광이다. 시즌마다 NBA 우승팀을 초청했고 미국대학스포츠협회(NCAA) 우승팀도 자주 예상했다. 농구를 즐겼고 골프도 핸디캡 15로 잘 쳤다. 조지 W 부시는 주지사와 대통령 당선에 앞서 미국프로야구(MLB) 텍사스 구단주이기..
2008년 교육인적자원부와 과학기술부의 통합으로 야심차게 출범했던 교육과학기술부가 간판을 내린 것은 출범 후 불과 5년 만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노벨 과학상 수상자를 다수 배출한 일본의 저력을 ‘문부과학성’에서 찾았지만, 정작 이를 본떠 만든 교육과학기술부가 오히려 과학기술 홀대 논란만 야기하면서였다. 교육과학기술부는 과학기술인들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오롯이 정부의 의지로 강행됐다. “교육과 과학을 처음부터 한데 묶고 접목해 미래를 대비하겠다”는 것이 초대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의 취임 일성이었다. 초대 장관도 교육계 출신이 아닌 뼛속까지 공학자인 김도연 서울대 교수를 임명하면서 과학강국으로의 의지를 강하게 내비쳤다. 출발은 야심찼지만 과학기술인들의 우려는 기우로 끝나지 않았다. 정부조직 개편과 함께 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