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지만 알아두시오. 첫째, 앞으로 야근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도록. 둘째, 소련을 따라잡기 전에 초과수당은 기대하지 마시오.” 2016년 개봉한 미국 영화 에서 알 해리슨(케빈 코스트너) 미국 항공우주국(NASA) 우주임무그룹 부장은 자신 휘하의 과학자 수십 명을 모아놓고 무거운 목소리로 이런 말을 던진다. 는 미국과 소련이 펼치던 우주 진출 경쟁을 시대적인 배경으로 한다. 해리슨 부장이 이런 지시를 내린 건 소련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이 인류 최초로 우주비행에 성공한 1961년 4월이었다. 영화는 위기감을 느낀 미국, 특히 NASA의 당시 분위기가 소련을 이기기 위해 가혹한 노동조건도 불사했던 것으로 묘사한다. 1960년대 우주 경쟁의 최종 승자는 잘 알려진 대로 미국이었다. 미국은 ‘새턴 5호’..
“코로나가 심하니 조심하시고, 안전벨트 한 번씩 확인해주세요.” 고속버스 기사님이 출발 직전 버스에서 열명 조금 넘는 승객에게 말했다. 지난 23일 이른 오후 경남 거제에서, 전날 마무리된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 파업 취재를 마치고 복귀하기 위해 오른 버스였다. “아시겠지만 테이크아웃 음료는 안 되니 조심해주시고요.” 승차 안내를 이어가던 기사님은 숨을 한 번 고르더니 이어 말했다. “대우조선 파업이 일단은 마무리됐습니다. 반가운 소식이죠. 하지만 완전히 해결된 건 아닙니다. 하청업체 분들 얼마나 많이 수고하십니까. 위험하고 열악한 곳에서 돈은 적게 받죠. 원청이 파이를 양보를 하고 나눠줘야겠죠. 하루빨리 해결의 실마리가 잡히길 바랍니다.” 고속버스 기사님들이 출발 전 안내하는 모습은 꽤 봤지만, 사회 ..
중·고생 자녀를 둔 한국 학부모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단어는 아마 ‘수포자’일 것이다. 수학을 포기한 자의 준말인 수포자는 곧 대학입시의 실패를 뜻하기 때문이다. 이달 초 들려온 허준이 프린스턴대 교수의 필즈상 수상 소식은 때아닌 수포자 논란을 야기했다. 논란은 기실 언론들이 시작했다. 수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필즈상 수상 소식이 타진된 날 오후부터 인터넷에는 “‘수포자’가 천재 수학자가 됐다”는 자극적인 제목들이 달린 기사들이 올라왔다. 그런데 내용을 보니 그 수포자의 스펙은 다소 특이했다. ‘어릴 적 수학에 큰 흥미가 없었지만 중3 때 과학고에 가볼까 생각했고, 시인을 꿈꿔 고교를 중퇴했으나 강남 유명 학원에서 입시 공부를 한 후 서울대 물리과를 한번에 합격했다…’라고. 이게 수포자라고? “수학 문제..
서울퀴어문화축제가 열린 지난 16일 서울광장. 퀴어퍼레이드가 시작되자 비가 내렸다. 퍼레이드 트럭을 향해 손을 흔들며 환호하던 시민들은 우산을 펼치거나 우비를 입고 행진에 나섰다. 빗줄기는 점점 강해지더니 급기야 퍼부었다. “흠뻑쇼네!” 장대비도 퀴어와 이들에게 연대하는 시민들의 마음을 꺾지 못했다. 이들은 비를 뚫고 나아갔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도 했다. ‘동성애 반대’를 외치는 시위대의 음성은 축제에서 퍼져나온 웃음과 함성, 빗소리에 묻혀갔다. “살자, 나아가자, 함께하자” 23회를 맞은 서울퀴어문화축제의 슬로건이다. 2000년 이후 이어져 온 퀴어문화축제에서 슬로건에 ‘살자’가 들어간 건 이번이 처음이다. 서울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회는 “혐오와 차별, 팬데믹, 자연재해와 전쟁 ..
끝나고 나서야 시작되는 영화가 있다. 엔딩 크레디트가 끝난 다음 마음속에서 계속 되감아 재생시키면서 의미를 묻고 해석하게 만드는 영화. 이 그런 영화다. 박찬욱 감독의 은 형사 해준과 살인 용의자 서래가 서로에게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드는 이야기다. 이 사랑의 외형을 보고 형사와 살인 용의자의 ‘금지된 사랑’이라는 클리셰, 혹은 ‘불륜’으로 범박하게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박찬욱은 클리셰를 넘어 해준과 서래의 사랑을 관객에게 설득시키는 데 성공했다. 해준(박해일)은 성실하고 능력 있는 형사다. 동시에 살인사건이 불러오는 비극에 중독된 사람이기도 하다. 한 남자가 벼랑에서 떨어져 죽은 사건을 맡게 되고, 중국인 아내 송서래(탕웨이)가 나타난다. 서래 역시 이중적 인물이다. 살인 용의자인 동시에 가정폭..
2020년 8월 김태년 당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부동산 폭등을 초래한 원인 중 하나는 이명박·박근혜 정부 9년간 누적된 부동산 부양정책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자고 나면 집값이 오르던 때였다. ‘이게 다 우리 탓은 아닌데’라는 억울함을 토로한 것이었겠지만, 집권 4년차 여당 원내대표가 전전 정부까지 들먹인 것은 무리수였다는 지적이 많았다. 범여권에서조차 “국민 반발이 커지니까 불만을 엉뚱한 데로 돌리려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왔다. 여당 대표가 불러낸 ‘전·전전 정부 책임론’은 그동안 당신들은 뭘 했느냐는 여당 무능론에 오히려 불을 지폈다. 정부가 부동산 대책을 23번이나 쏟아낸 뒤여서 더욱 그랬다. 처음에 정치적 수사 정도로 치부됐던 ‘이명박·박근혜 정부 책임론’은 각료들까지 가세하더니, 문재인..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버리기 전까지는 복지부, 버린 후엔 경찰.” 제75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후보작이자 남우주연상 수상작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에서 극중 형사인 ‘수진’(배두나)이 한 말이다. 베이비박스에 아이를 버린 엄마를 탓하기 전에 왜 엄마를 돕지 못했냐고 묻는 ‘이 형사’(이주영)의 물음에 대한 대답. 이들의 대화는 아이가 완전한 돌봄을 제공받고 보호자는 아이를 양육하는 데 지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그 책임이 정부에 있음을 드러낸다. 보건복지부든, 경찰이든 말이다. 한국 드라마나 영화가 해외에서 큰 관심을 받고, 권위 있는 상을 받을 때면 ‘K국뽕’이라고 해도 관심이 갔다. 만듦새와 별개로 씁쓸한 생각도 들었다. 작품 내용들이 ‘자랑’거리는 아니어서다...
“모두 본질을 잊은 것 같아요. 우리는 탐험가이자 개척자였는데 말이죠.” 2014년 개봉한 미국 영화 는 기후가 황폐해지면서 농작물 수확량이 줄고, 먼지 폭풍에 숨조차 쉬기 어려운 가까운 미래의 지구를 배경으로 한다. 이 사회에서 과학 연구는 중단돼 있다. 모자라는 건 당장 필요한 식량이지 고성능 텔레비전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우주에 대한 호기심은 잠꼬대로 취급받는다. 영화 속 주인공 쿠퍼(매슈 매코너헤이)가 우주개척 시대를 떠올리며 내뱉는 탄식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고민이다. 그런데 에서 인류을 구한 건 결국 우주다. 토성 근처에 생긴 ‘웜홀’(우주에서 먼거리를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지름길)을 통해 다른 은하계로 떠난 쿠퍼는 인류를 더 나은 곳으로 이주시킬 초대형 우주선을 띄울 물리학적 원리를 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