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구와 인간의 관계에 대한 철학자 하이데거의 통찰은 탁월하다. 일단 그는 인간과 외부세계의 관계를 서로 분리돼 있거나 고립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인간이 그를 둘러싼 환경과 만나는 순간, 그 환경은 객관적 사물의 세계에서 인간의 환경으로 바뀌고 인간 역시 그것에 의해 구성된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런 세상을 ‘생활세계’라 부르는데, 인간에게 있어 객관적 외부세계는 차라리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만큼 죽은 사물의 세계에 불과하다. 이런 생활세계를 구성하고 또 그것에 의해 구성되는 인간에게 도구는 중요한 매개자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도구를 통해 저 죽은 객관의 세계를 생활세계로 탈바꿈시키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도구를 ‘손 안에 있는 것’(Zuhandens)으로 정의함으로써 ‘눈앞에 있는 것’(Vo..

나는 라는 유튜브 콘텐츠를 진행한다. 레드벨벳의 슬기와 MC를 맡아 음악인들을 심층 인터뷰하는 콘텐츠다. 얼마 전 이날치가 게스트로 나왔다. 이 밴드의 네 소리꾼은 중학교, 늦어도 고등학교 때 국악 엘리트 코스에 들어섰다. 보통 사람이면 장래 희망은커녕 가고 싶은 학과도 막연할 때 인생을 거는 선택을 했다. 옆에 있는 슬기 또한 10대 초중반부터 SM에서 연습생으로 트레이닝을 받기 시작했다. 근대 교육은 예술 엘리트를 만들어냈다. 어릴 때부터 명인의 레슨을 받고, 관련 학교에 진학한다. 유수의 클래식 콩쿠르에서 수상하는 청년들이 대부분 그런 코스를 밟았다. 현대 대중 예술에는 그런 ‘영재 코스’가 존재하지 않는다. 대학에 관련 학과가 있다는 점은 같지만 10대에는 모두 취미의 영역에 머문다. 친구들끼리 ..

김희준이 쓴 (난다, 2021)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마무리는 분명히 있어, 엄마.” 김희준은 1994년에 태어나 2017년에 데뷔하고 2020년 불의의 사고로 영면한 시인이다. 그해 그의 생일에 맞춰 첫 시집이자 유고 시집인 이 나왔다. 지구라는 행성에서의 표류를 마치고 언니의 나라에서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생면부지의 시인을 생각한다. 마무리는 분명히 있다고 말할 때, 그의 눈은 분명 반짝였을 것이다. 표류할 때 원래 가고자 했던 방향과 목적이 선명해지기도 하니 말이다. 지난 8일, 제32회 도쿄 올림픽이 막을 내렸다. 개최 여부를 두고 잡음이 끊이질 않았으나 우여곡절 끝에 막을 올린 올림픽이었다. 지구라는 행성이 이토록 크다는 사실을, 재능 있는 이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을 올림픽은 상기시켜 주..

올림픽 배구 한·일전이 열린 밤에 나는 밖에 있었다. 휴대폰으로 포털사이트에 들어가 경기 결과를 확인했다. 이겼구나. 택시를 타자마자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봤어?” 한껏 상기된 기운으로 건네는 친구의 첫 마디를 듣자마자 나는 마스크 속으로 입꼬리를 실룩이며 웃었다. “못 봤어. 이겼다며? 이겼으면 됐지.” 기운 없는 내 대답이 미안했다. 접전 끝에 5세트. 박정아의 영리한 블로킹과 오지영의 처절한 디깅 같은 것을 생생하게 중계하느라 친구의 숨이 가빴다. 12 대 14 매치포인트, 14 대 14 듀스, 15 대 14 역전, 다시 매치포인트. 연속 4득점 극적인 승리. “이 경기를 놓친 거 두고두고 후회할 걸? 꼭 다시 봐!” 통화가 일방적으로 끝났다. 이제 내가 얼마나 지쳤는지, 한·일전만큼 다이내믹했..

“1만년 후에 혹시 외계인이 지구에 오면 이 시대를 뭐라고 할까?” 잘 튀겨진 치킨 한 조각에 시원한 맥주를 들이켰는데 친구가 불쑥 질문을 던진다. “인류세 아닌가?” 자신 없는 내 대답에 “인류세는 개뿔, 치킨세지!” 하는 친구의 답을 듣고는 푸확, 입안의 파편이 튈 뻔했다. 정말 그렇겠다. 땅을 파면 어디에서나 발견되는 닭뼈 화석을 보고 지구를 닭의 행성으로 착각할지도. 전 세계 인구가 78억인데 사육되는 닭의 마릿수가 230억마리인 것만 봐도 그렇다. 종교적 금기도 없는 데다 사육이 쉽고 생장도 빨라서 닭은 오랫동안 육류 생산과 소비에서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만 해도 해마다 6억마리를 먹는다니 5천만 인구가 매달 한 마리는 꼬박 먹고, 연령별 편차를 고려하면 청·장년층은 매주 한 마리를..

“요즘은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어느 예능 작가가 모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에서 제안한 성인 예능을 거절했다며 한 말이다. 방송국도 아니고 OTT다. 심의에서도 자유롭고 제작사의 압력도 없다. 게다가 타깃이 성인층이니 지상파나 케이블의 예능보다 할 수 있는 게 많을 것 같다. 제의받은 페이도 꽤 짭짤했다. 그런데 왜? 짐작할 수 있었다. 시청자, 또는 소비자의 압력이 너무 크다. 관에 의한 검열은 대부분 반기를 든다. 독재 정권 시절의 검열은 조롱의 대상이었다. 이를 회피해서 메시지를 숨겨놓는 경우도 있었다. 전두환 정권 시절 이선희의 ‘한바탕 웃음으로’를 비롯해 적지 않은 인기곡들이 5·18에 대한 노래였다. 관에 의한 검열은 공연윤리위원회 폐지와 함께 1996년 사라지는 것 같았지만 20..
SNS에 매일 책 읽는 계정을 만든 지 반년이 지났다. 정확히 말하면 읽은 책에서 인상적인 구절을 골라 올리는 계정이다. 프로필에는 이렇게 적어두었다. “하루에 한 권, 책 읽는 계정입니다. 함께 나누고픈 구절을 올립니다.” 사진을 함께 올려야 되는 채널이라 매일같이 책 표지 사진도 찍는다. 물론 대부분 집에서 찍은 사진이다. 예전만큼 사적인 외출이 많지도 않을뿐더러 책을 읽기 위해 카페나 공원을 찾는 일도 현저히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간혹 이동할 때면 책을 두세 권씩 들고 나간다. 다 읽지 못할 것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욕심을 덜지 못하겠다. 예전엔 버스나 지하철의 백색소음과 크고 작은 흔들림이 집중에 도움이 됐다면, 마스크 때문인지 이제는 여간 답답한 것이 아니다. 마스크를 낀 채 책을 읽을 때면 ..
드라마 를 보다가 한 장면에 묘한 공감을 느꼈다. 이제 막 지방 사업부 하나를 정리하고 온 ‘한영전자’ 인사팀 에이스 자영(문소리)은 늦은 밤 집에서 룸메이트와 이야기를 나누다 갑자기 집을 나선다. 자영이 가는 곳은 주차장에 주차된 본인의 차 안. 운전석에 앉아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던 그는 전화가 걸려오자 눈을 질끈 감고 스스로에게 기합을 넣는다. 전화기 건너편엔 자영의 상사가 있고 그가 자영에게 또 한 번의 대규모 해고 업무를 맡겼다는 사실과 그 대가로 자영에게 주어진 것이 승진의 기회라는 것을 알고 나면 늦은 밤 그가 뱉은 고된 숨의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누구를 해고할 지위도 아니고, 그런 업무의 근처에도 가본 적 없으며 오히려 그런 ‘인사권’이란 것에 뭉뚱그려진 적개심만 가득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