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칼럼에서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All lives matter)는 말에 대해 잠깐 쓴 적이 있다.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라는 구호에 맞선 백인들의 주장인데, 맥락을 모르면 보편타당함을 위장한 이런 말에 걸려들기 십상이다. 비슷한 예로 이퀄리즘(equalism)이 있다. 성 평등을 뜻하는 이 말이 페미니즘에 대한 반발로 나왔다는 것을 모르면 오독하기 쉽다. 여성 권리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거기에 대고 이퀄리즘이라니, 단 두 개뿐인 성에서 결국 누구의 권리를 얘기하겠다는 건가? 평등을 가장한 이런 주장들은 마치 우월적 지위의 대형마트가 동네슈퍼에 대해 ‘시장에서의 공정 경쟁’을 보장하라고 외치는 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평등’이나 ‘공정’이라는 말의 ..
팝 음악계는 변혁의 격랑 위에 있다. 스트리밍이 대세가 되면서 스포티파이, 애플뮤직의 플레이리스트 담당자는 과거 디제이와 저널리스트의 자리를 차지했다.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은 인종, 성소수자에 대한 다양성 배려가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그저 다른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BTS를 비롯한 K팝 스타들의 승승장구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격변의 시대를 읽기 위해서는 음악성과 상업성이라는 잣대만으로는 부족하다. ‘대중 음악’의 탄생 또한 기술 및 사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19세기 후반 토머스 에디슨이 레코딩 기술을 발명하면서, 음악에는 악보와 공연뿐만 아니라 음반이라는 세계가 주어졌다. 음반은 악보를 읽기 위한 지식, 공연을 보기 위한 시공간적 제한으로부터 청자를 해방..
퇴사를 결심한 친구를 만났다. 사직서를 제출하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했다. “도저히 못 견디겠더라.” 부러진 음절들이 바닥에 툭툭 떨어졌다. 10년을 넘게 다니며 좋은 기억도, 힘든 일도 많았을 것이다. 그사이 그는 두 번의 승진을 했고 부서와 업무가 달라지는 상황에서도 묵묵히 일했다. 곁에서 지켜본 바로는, 그의 생활은 회사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주중에 만나면 회사에서의 고단한 노동이 고스란히 느껴졌고 주말에 만나면 그의 입에서 다음주에 치러내야 할 업무가 술술 흘러나왔다. 그에게 회사는 단순히 밥벌이 수단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곳이었다. 처음에 나는 그의 말에 쓰인 ‘견디다’란 단어를 첫 번째 사전적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러니까 “사람이나 생물이 일정한 기간 동안 어려운 환경에 굴복하거나 죽지..
통근길은 경로가 적어도 두 가지 이상은 돼야 한다. 거리와 소요 시간이 모두 짧은 최적의 길을 미리 알고 있는 나는 꽤나 돌아가지만 하천변에 벚나무를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길, 신호등이 많고 자주 정체되지만 큰 횡단보도에 사람들이 북적이는 길을 대안으로 마련했다. 일의 효율을 숫자로 놓고 따지던 때엔 절대 하지 않았던 낭만적인 행위다. 그러나 이 일상이 적어도 20년 이상은 반복될 것이라는 걸 깨달은 뒤엔 미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 어찌 보면 일이 아닌 삶 전체의 효율을 위해 모색한 방안인 셈이다. 할머니가 죽고 엄마가 아프기 시작한 뒤 나는 조금 달라졌다. ‘금쪽이’가 되어 채우지 못한 유년기의 애착을 갈구하는 시간보다 엄마와 할머니의 인생에 대해 상상하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손..
이반 일리치는 이런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사람들은 질료 또는 물질적 대상에는 역사성이 없는 것처럼 생각한다. 태초부터 물질은 변함없이 그대로 존재해왔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물질에도 역사가 있고 우리 인식에 따라 변화해왔다고 믿는다. 과거의 물과 오늘날의 H2O는 다른 것이다.” 이런 말을 인식론적으로 해석하면 곤란하다. 인간을 둘러싼 환경과 물질은 우리의 인식 여하에 따라 존재가 결정된다는 관념론적 주장이 아니다. 어차피 인간과 관련된 의미의 포획망 안에 걸려들지 않는 사물이란 알 수 없는 것이고, 따라서 의미도 없다. 우리가 아는 물질과 대상은 인간과 더불어 존재했고, 사회적으로 함께 변화해온 것이다. 그리하여 일리치는 사물 자체보다는 그것이 현재의 사물이 되게끔 한 역사와 이유가 중..
2년이 다 되어가는 코로나19 시대. 음악계는 말 그대로 위축되고 쪼그라들었다. 어둠과 빛은 공존한다. 작년 가을 무렵, 한 고급 오디오 취급 업체 사장을 만났다. “어려우시죠?”라는 질문에 그는 멈칫거리며 대답했다. “사실… 남들한테 미안해서 말은 못하는데 이쪽 시장은 엄청 호황이에요.” 거리 두기가 시행되면서 일상적으로 행해지던 많은 활동들이 중단됐다. 자영업자들이야 고난의 행군을 겪었지만, 전 세계적으로 금융자산의 가치는 폭등했다. 부동산, 주식, 가상통화… 가리지 않고 그랬다. 부동산으로 얼마를 벌었다더라, 비트코인으로 돈이 복사되는 체험을 했다더라… 이런 이야기들이 쉽게 들려왔다. 그런데 거리 두기로 인해 소비할 수 있는 대상이 대폭 줄어들었다. 번 돈이 많아진 사람, 원래 많이 벌던 사람들 모..
쓰기 노동자로 산 지 20년이 다 되어간다. 말하기 노동자로 지낸 지도 꽤 되었다. 2000년대 중반부터 연단에 설 기회가 있었다. 그때마다 자기 암시를 통해 ‘연단’을 ‘무대’로 바꾸어 생각했다. 무대의 세 번째 뜻인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곳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 특히 좋았다. 나의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현장 같기도, 이곳에서 하는 이야기가 또 다른 이야기로 탄생하는 순간 같기도 했다. 한 번도 대충 이야기한 적은 없었다. 이야기의 배경이 다 다른 만큼, 거기에 걸맞은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했다. 현장의 눈빛이 커다란 응원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눈빛에는 호기심이 어려 있었다. 초등학생부터 어르신까지 지금껏 만나온 사람들은 사는 곳부터 관심사까지 다 달랐다. 무대가 나를 들뜨게 만들 때도 있..
심수봉 노래를 듣는 사람의 표정은 낭만적이다. 화선지에 먹물이 떨어져 스미는 것처럼 잠시 굵게 맺혔다가 서서히 번지는 목소리는 형언할 수 없는 신비로운 감정을 만든다. 나는 괜히 사연을 가진 사람처럼 아련한 시선을 허공에 두었다가, 미세한 떨림으로 증폭되는 후렴구를 따라 부르며 비련에 휩싸인다. 내가 노래를 찾아 듣기 시작했을 때, 심수봉이란 이름은 이미 한 장르를 뜻하는 것이었다. 재즈, 포크, 트로트, 발라드…. 내가 구분할 수 있는 음악들을 조금씩 머금은 심수봉의 노래에는 테두리가 없었다. 어떤 가수들은 ‘가수’라는 단어 앞에 장르를 붙이지 않고, 자신의 이름을 라벨로 사용할 수 있는데 그것 또한 심수봉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지난달 19일, KBS에서 방영한 은 36년 만에 개최된 심수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