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과도한 노동강도를 호소하며 트럭 시위에 나선 스타벅스 직원들의 소식을 접하고는 씁쓸한 기분을 감추기 어려웠다. 노조 설립을 권하는 민주노총에 대해 이들이 보인 반응 때문이었다. “우리 스타벅스는 노조 없이도 22년간 식음료 업계를 이끌며 직원에게 애사심과 자긍심을 심어준 기업이다.” “트럭 시위를 당신들의 이익 추구를 위해 이용하거나 변질시키지 말라.” 이 소식을 전하는 뉴스에는 아니나 다를까 ‘밥숟가락 얹으려다 망신당한 민노총’ 같은 비아냥 댓글이 여럿 달려 있었다. 결과적으로 스타벅스코리아가 1600명을 신규 채용하겠다고 하니, 직원들은 시위의 효능감을 충분히 맛보았을 것이고, 우리는 역시 다르다는 자부심도 더해졌을 것이다. 이런 사용자와의 동일시, 반정치적 결벽성, 고립주의 등은 대체 어디..

백신 접종이 시작되고, 접종률이 올라가면서 희망을 가졌다. 한순간에 사라지다시피 한 공연들이 다시 찾아오리라는. 하지만 닿을 듯 말 듯, 다시 멀어지는 무지개처럼 공연은 왔다가 다시 멀어져갔다. 올가을도 많은 페스티벌과 콘서트가 취소되고 연기됐다. 그래도 숨통이 꽁꽁 틀어막힌 건 아니다. 정식 공연장으로 등록된 시설에서 열리는 행사는 다행히 가끔 보인다. 거리 두기 때문에 수익이 보장되지 않고, 따라서 적극적으로 개최되지 않을 뿐 공연에 대한 욕망과 의지는 이어지는 것이다. 오는 22, 23일 열리는 라는 공연이 있다. 동아기획과 학전소극장과 관련된 뮤지션들이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여 노래한다. SM, 하이브, JYP 같은 대형 기획사들의 특징은 무엇일까. 그 회사에서 데뷔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화제가 되고 ..

지난 10월3일, 수경 누나를 보러 갔다. 꼭 1년 만이었다. 재작년부터 한가을은 늘 누나와 함께였다. 생전에 주고받은 e메일을 들여다보며 ‘잘 지내지? 거기에도 쌀 있지?’ 같은 물색없는 질문을 던진 후 혼자 웃기도 했다. 누나가 살아 있을 때 못다 전한 말을 이제야 건네는 것처럼, 대답을 듣지 못해도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가을 하늘을 올려다보고 혼잣말하기도 한다. “누나라면 저 하늘의 색을 뭐라고 표현했을까?” 없는 존재를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것이 상상이라면 회상은 있던 존재를 떠올리는 것이다. 어릴 때는 상상하는 것이 마냥 즐겁기만 했는데, 성인이 되고 나니 상상하는 자리에 종종 회상이 들어서곤 했다. 이는 그동안 많은 관계를 맺어왔다는 말도 될 것이다. ‘각자의 이야기’로 사라질 수 있었던 것이..
‘육지담의 이름이 육지담이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화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인터넷엔 ‘육지담 이론’이라 불리는 가설이 존재한다. 2014년 에 출연했던 고등학생 래퍼 육지담은 심사위원에게 만장일치로 ‘패스’를 받은 초반 라운드와 달리 점점 난관에 부딪히게 되는데, 이때 누리꾼들이 제기한 것이 바로 ‘육지담 이론’이다. 봉준호 감독의 이름이 김준호였다면? 배우 마동석의 이름이 이동석이었다면? ‘육지담 이론’에 따르면 그들은 결코 지금과 같은 존재감을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이 이론은 ‘브랜드 네이밍’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가장 완벽한 예시인 셈이며…. 그러니까 다시 ‘육지담 이론’을 떠올린 건 이하늬가 1인 2역을 맡은 드라마 을 보고 이것이 재밌다는 사실을 주변에 알리려 결심했을 때다. “폭력조..

추석 상에 빼곡히 올라온 고기며 전이며 생선을 보면서 씁쓸한 기분을 감추기 어려웠다. 몇 년간 채식을 지향하다 포기한 후로 여전히 고기를 꺼리는 마음이 남아 있어서일까? 지키지도 못하는 나의 도덕을 남에게 강요할 생각은 없지만, 유별나게 고기를 탐하는 젊은 조카들이 보기 싫은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우리 세대와 달리 고기를 맘껏 먹고 자란 젊은 세대는 채소와 나물에는 젓가락도 대지 않고 그저 고기를 찾는다. 사실 고기가 더 맛있지 않나? 하지만 나는 ‘입맛’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고약한 북유럽의 청어절임, 전라도 홍어도 몇 번 먹다보면 그 맛을 알게 되며, 채식을 하던 즈음 고기 굽는 냄새가 역겨웠던 적도 여러 번이기 때문이다. 입맛도 관념도 사실은 모두 만들어지는 것이다. 안희곤 사월의책 대표 육..

지난 8월31일은 걸그룹 아이즈원의 멤버였던 장원영의 생일이었다. 이미 해체한 팀인 데다가, 솔로 활동도 하지 않고 있는 장원영의 팬덤은 이 시기를 즈음하여 서울 지하철역을 장원영으로 도배했다. 장원영 팬클럽이 산 광고판만 1200개 이상으로 추산되니, 얼마나 큰 비용이 들었을지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이 돈의 대부분은 중국 팬클럽에서 나왔다. 중국 팬클럽은 몇 달 전부터 웨이보 공식 계정을 중심으로 모금 행사를 진행, 우리 돈으로 약 3억6000만원을 모았다. 잠깐, 여기서 하나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아이즈원과 장원영은 중국에서 정식으로 데뷔한 적이 없다. 프로듀스 시리즈는 중국에 방영된 적이 없고, 아이즈원과 장원영 또한 한국과 일본에서만 활동했다. 알다시피 중국에서는 유튜브를 비롯한 서구 SNS를..

“안색이 왜 그래요?” 상대는 분명 나를 염려해서 한 말일 텐데,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화장실 거울 앞에서 마주한 나는 평소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피로해 보여서일까. 방금 전의 내 모습을 알 수 없기에 속이 복잡했다. “뭔가를 잃어버린 표정 같아요.” 다시 돌아간 자리에서 그가 말을 이었다. 3년 만에 만나는 자리였다. 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사이 내게 일들이 있었다. 소중한 이들을 잃었고 나는 그 사실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집에 돌아오는 길, 뭔가에 홀린 듯 인테리어 소품 가게에 들어가 모래시계를 구입했다. 진열장에 있는 모래시계가 나를 자꾸 쳐다보는 것 같았다. 안색을 살피며 “괜찮아?” 하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뭔가를 잃어버린 표정”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즉각적으로 요동했던 내 ..
“역시 여자의 적은 여자라더니….” 한 시간이 넘도록 의견 조율에 애를 먹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저런 말이 나올 만큼 끔찍한 자리는 아니었다. ‘뭐지? 새로운 공격 패턴인가? 갑자기 왜 저 말을 하는 거지?’ 나는 당황했지만 빨리 판단을 하려 했다. 이 말을 무시하고 쟁점으로 다시 돌아가 끝을 낼 것인지, 아니면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문장을 바로잡는 새로운 다툼을 시작할 것인지. 짧은 고민 후에 전자를 택한 데에는 상대와 내가 페미니즘 이슈에 비슷한 입장을 공유하며 쌓은 신뢰가 작용했다. 그리고 정확히 같은 이유로 그 말의 의중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회의가 끝난 뒤 자리를 따로 만들었다. “왜? 난 좋은 뜻으로 얘기한 거야!” 밝고 천진한 해명 때문에 머릿속이 더 복잡했다. 언니, 그 표현은 ‘한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