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다린다. 9월24일을. 그날 많은 사람들이 광장으로 나올 것이다. 오후 3시, 서울 광화문광장에서부터 기후정의행진이 시작된다. 2019년 대학로에서 열린 대규모 기후위기 집회 이후로 가장 큰 규모의 집회가 될 것으로 예상한다. 내가 속한 모임도 4일 모여 회의를 했다. 우리는 조금 일찍 만나 커다란 깃발을 만들기로 했다. 각자 깃발에 붙일 상징들을 하나씩 가져와 붙일 계획이다. 오랜만에 깃발을 들어보겠다. 책을 만드는 사람들이니까, 기후정의와 관련된 책을 들고 와서 길거리 독서회도 하기로 했다. 여기저기 속한 단체들이 다 나온다니, 어느 깃발 아래서 행진을 해야 할지 즐거운 고민을 한다. 누구는 몸에 풀을 붙이고 온다고 하고, 누구는 허리춤에 호미를 차고 온단다. 누구는 개구리의 전령이 되어, 누..
현대 민주공화국은 ‘헌법국가’를 지향한다. 헌법 제10조가 선언하듯이 국가의 존립 이유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보장하는 것이다. ‘헌법에 의한 지배’가 민주공화국의 기본형태가 된 것은 서구의 경우에도 채 100년이 되지 않는다. 근대국가의 태동과 함께 성문헌법이 일반화되기 시작한 이후에도 헌법은 정치를 제대로 통제하는 규범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장식적 혹은 명목적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근대 이전의 절대권력의 시대는 아예 민주적 입법기관으로서의 의회 자체가 형성되지 못하고 법규범 또한 절대권력의 전횡을 정당화하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행정국가’의 전형을 보여준다. 시민혁명을 계기로 의회가 국정과제를 법률의 형식으로 규범화하는 의회민주주의의 시대가 도래하였지만 법률의 정..
현 정부가 연금·노동·교육 부문을 개혁의 대상으로 삼는 이유를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다. 개혁을 통해서 연금 부담액은 늘리고, 노동은 유연화하며, 교육은 친기업화하겠다는 것이다. 교육을 기업의 입장에서 보면 학교는 미래 노동자들을 주조해 내는 공장과 같은 곳으로 읽힌다. 학교와 대학이 기업이 필요로 하는 노동자를 싼값에 공급하라는 압력이다. 사실, 이런 방식의 변화를 ‘교육개혁’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민망한 일이다. 교육개혁은 교육에 몸담고 있는 학생과 학부모들을 위한 개혁이어야 한다. 만 5세 조기취학이나 반도체학과 신설 등은 ‘공부 노예’로 살아가는 아이들의 삶의 질 개선보다는 기업요구에 맞춘 노동시장 편입에 교육을 편제하려는 윤석열 정부의 의도를 잘 투영해준다. 교육개혁의 역사는 늘 미완성의 연속이..
이 땅에서 학자로 산다는 것이 부끄럽다. 교수로 재직하는 것에도 자괴감이 든다. 국민대 교수회가 무려 61.5%의 반대로 김건희 논문 재검증도 하지 않고 조사위원회 조사자료 공개도 요구하지 않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벌써 열흘이 지났지만 곱씹지 않을 수 없는 소식이다. 논문의 수준은 더 이상 거론하고 싶지 않다. 더 큰 문제는 표절이 분명하고 수준 이하인 논문을 통과시키고도 지도교수를 비롯해 교수들 다수가 이를 묵인, 방조, 은폐하고 있다는 것이다. 표절은 굳이 학술적 정의를 따르지 않더라도 표준국어대사전에 ‘시나 글, 노래 따위를 지을 때에 남의 작품의 일부를 몰래 따다 씀’이라고 나와 있다. 상식적 수준에서도 남의 작품을 베껴 마치 자신이 지은 것처럼 사용하는 행위라는 것이 자명하다. 한자로도 ‘겁박..
이번 여름은 휴가철이 무색하게 폭우가 수없이 많은 이들을 슬픔에 잠기게 했다. 피해현장의 생생한 모습들이 제보영상을 통해 확인될 때마다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그런데 영상 속에서 나의 눈길을 끈 것은 폭우를 뚫고 출퇴근을 감행해야만 하는 직장인들이었다. 헤엄치듯 출근을 감행하는 직장인의 모습 속에서 과연 한국인에게 성실한 직장인이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저들을 비와 땀에 젖게 만들며 직장으로 이끄는 그 보이지 않는 끈은 무엇일까 하고 말이다. 노동과 건강 문제를 연구하다보면 가장 큰 의문은 과로죽음의 현실이다. 즉, 과로사와 과로자살 말이다. 과로사(過勞死)의 영어 번역어가 일본어 발음 그대로인 Karoshi를 사용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일본에서는 1973년 오일쇼크 이후 구조조정 ..
김명신(김건희)의 (2008)는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킬 만한 ‘엄청난 논문’이다. 이 논문은 “IT 기반의 디지털 산업과 운세 콘텐츠”의 접맥을 시도했다는 측면에서 놀랍다. 이 논문이 시론적 연구인 만큼 학문적 체계, 형식과 내용, 연구윤리의 측면에서 보다 엄밀한 검증이 필요하다. 본 심사자는 다음 사안에 대한 청구자의 수정과 숙고를 요청한다. 첫째, ‘통상적 용인 범위’ 내에서 박사논문의 요건을 충족하고 있는가이다. 인문사회 분야의 박사논문으로서는 예외적이고, 특별하게도 이 논문은 각주가 단 ‘30개’에 불과하다. 심사자는 30개만으로 이뤄진 박사학위 청구논문을 최초로 접했다. 학술지에 게재되는 일반논문도 최소 20~30개의 각주가 있다. 각주가 30개뿐인 박사논문은 ‘통상적인 용인 범위’를 크게..
대머리 남자는 주걱턱 여자와 궁합이 좋고, 주먹코 남자는 키 큰 여자와 어울리며, 콧구멍이 큰 남자는 입이 크고 튀어나온 여자와 궁합이 맞는다, 는 식의 내용을 이것저것 남의 글을 함부로 Ctrl+C, V한 것과 얽어 써도 얼마든지 ‘박사’가 될 수 있다는 현실을, 대학과 학계 바깥에 있는 이들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부끄럽고 막막하다. 그런데 ‘김건희 박사’ 덕분에 오늘날 한국 대학과 학문 제도에 대한 시민의 관심이 부쩍 높아졌으니, 문제를 똑바로 보고 바로잡아볼 기회이기도 하다. 이는 단지 대학과 학문사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민주주의의 근간이 걸린 큰 문제다. 김건희들은 대학과 학문을 자신들의 돈과 권력을 늘리고 또 그것을 자식에게 세습하는 수단으로 갈취한다. (지식정보와 상징자본이 제대로 분배돼 ..
내가 어렸을 때 ‘부자’라는 말은 좋은 어감은 아니었다. ‘저 사람, 부자래’라고 시작하는 말 뒤에 따라붙는 십중팔구는 대개 나쁜 말이었다. 동화책에 나오는 부자의 모습도 좋게 그려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욕심 많고, 인색하고, 고약한 인물이 태반이었다. 실제 세계에서 만나는 부자들도 대체로 그랬다. 선생님에게 촌지를 주는 부자 학부모도, 자동차를 타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와서 내리며 교장 선생님의 마중을 받는 육성회장도 모르는 것 같았지만 우리는 다 알고 있었다. 종종 뉴스에선 ‘땅투기, 집투기, 돈놀이’ 하다가 발각된 ‘있는 사람들’이 경찰에 끌려가는 모습이 나왔다. 사람들은 모두 혀를 차고, 침을 뱉고, 손가락질을 했다. ‘높은 사람’과 ‘있는 사람’들의 반사회적 범죄는 더 엄벌을 받아야 한다고 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