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통일부에서 주최하는 한독 통일자문위원회 회의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최근 부각되고 있는 권위주의의 부활, 남미의 핑크 타이드, 동유럽 포퓰리즘의 재등장 등과 같은 민주주의 침식 현상에 대한 독일식 해석을 접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회의였다. 독일 통일의 후유증을 ‘날것’으로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글로벌 현상 속에서 문제를 재포착하고자 하는 그들의 인식은 우리 통일을 보는 시각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군데군데 남북관계 상황과 한국의 현실 인식을 매끄럽게 독일 측에 전달하며 그들의 인식 지평을 확장시켜 준 통일부의 세련된 노하우도 회의를 매끄럽게 만든 윤활유였다. 인상 깊었던 것은 독일 연방정부가 현재 ‘독일 통일과 유럽의 전환을 위한 미래센터’ 설립을 진행 중이라는 점이었다. 미래센터의..
태풍 힌남노가 지나가던 때의 정황은 상징적이었다. 아직도 복구 작업이 진행될 정도로 한반도 동남 해안을 세게 타격하고 간 태풍은 일부 ‘서울사람들’에게 ‘강 건너 불’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역대급이었던 것은 태풍이 아니라 정부와 미디어의 호들갑이라며 ‘속은 느낌’이라고도 했다. 그런데 어쩌면 그런 태도는 특별한 것도 악랄한 것도 아닌, ‘중심’의 자리에서 미디어로 중계되는 ‘타자의 고통’을 보는 보통(?)의 무심함인지 모른다. 서울에서 살면서 안 건데 어쩌면 가장 자연스러운 ‘서울스러움’이란 아예 지역이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생각하거나, 엄청난 격차와 차별 자체를 의식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거기도 카카오 택시가 있니? 그런 대학도 있어? 어, 스타벅스도 있구나.’ 단언컨대 여기에는 좌우가 없다. 어쩌..
택배 물량이 폭증하는 추석 연휴를 앞두고 유독 눈길이 가는 책이 있었다. 갓 출간된 (민중의소리)라는 제목의 책이다. 책은 2020년 10월12일 새벽 6시 자택 욕실에서 안타깝게 사망한 장덕준씨의 어머니 이야기로 시작된다. 27세의 건강한 남성이 쿠팡 칠곡물류센터에서 1년반을 근무한 끝에 급성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무리한 근육 사용으로 횡문근융해증까지 의심되는 상황이었다. 결국 지난해 2월9일 근로복지공단은 장덕준씨의 죽음을 ‘업무상 재해’에 의한 사망으로 판정했다. 책을 보며 눈을 뗄 수 없었던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휴식을 권했던 가족의 만류에 장덕준씨가 답했던 말이었다. “(내가) 안 나가면 다른 사람이 고생한다.”(43면) 그의 대답에는 오랫동안 동고동락한 동료들에 대한 걱정이 묻어났다. 물론..
해외출장에서 인터넷을 자유롭게 쓰고 싶은 SK텔레콤 이용자들은 하루에 9000~1만원을 하는 Onepass300을 많이 써왔다. 6월1일부터 혜택이 ‘확대’되었다며 통지가 왔다. “변경 전: 문자메시지 이용건당 SMS 165원 - 변경 후: 문자메시지 기본제공. 해외에서 데이터를 이용하거나 문자메시지를 보낸 날에만 이용요금이 청구됩니다.” 어감은 달콤하게 들리지만 요금폭탄이다. 이전에는 문자메시지가 데이터로밍 정액상품에 포함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포함되면서 전에는 문자 1건에 165원을 냈지만 이제 9000원을 내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 즉 하루에 문자메시지 발신을 1건만 하는 사람은 건당 요금이 54배로 늘어난다. 경악스러운 것은 데이터로밍 요금을 피하기 위해 기기(휴대폰)에 로밍차단 설정을 해놓아도 문..
추석 연휴에 동네 공원과 산책길에서 오가는 어르신들을 보았다. 올해 주민자치활동에 참여하면서 여러 경로당과 어르신 집을 방문한 덕분에 생긴 새로운 관심이다. 주민들이 귀향해서인지 곳곳이 차분하고 가끔 만나는 어르신들도 조용하시다. 평온하신 걸까, 적적하신 걸까. 어르신 표정을 자신있게 설명하지는 못하겠지만 생각은 자꾸만 후자로 향한다. 대부분 홀로 사는 분이라는 경로당 회장님의 이야기도 떠오른다. 며칠 전 회의에서 들은 ‘노인 1000만명’도 마음을 무겁게 한다. 통계청에 의하면 65세 이상 인구가 2024년에 1000만명을 넘는다. 이후에도 가파르게 증가하여 생산인구 1명이 노인 1명을 부양하는 시대가 온다는데 새삼스레 겁이 덜컥 났다. 그때 나는 초고령 노인일 텐데 어떻게 살고 있을까? 사실 노후 불..
일에는 때가 있다. 씨앗을 뿌릴 때가 있고 거둘 때가 있다. 대통령 관저를 짓는 일도 그렇다. 취임 100일간이라는 국민 통합 황금기에 청와대에 입주도 하지 않은 채 새 집을 짓는 건 때에 맞지 않다.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새로운 비전 제시와 국민 통합에 전념해야 했다. 보름 전, 론스타에 2925억원과 지연이자 약 185억원을 합해 약 3110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중재 판정이 있었다. 판정 후 120일 안으로 한국은 판정을 이행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그날 이후 한동훈 법무부 장관의 행동은 때에 맞는가? 장관은 이의신청을 검토할 것이며 충분한 승산이 있다고 발언했다. 그리고 판정문의 요지라면서 일방적으로 공개하면서 정부에 유리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 장관은 말하지 않는다. 그가 충분한 승산이 있다고 ..
나는 올해 초등학교 1학년 학부모다. 국민학교 교정을 떠난 지 33년 만에 초등학교 교육과정을 접하는 셈이다. 달라진 건 너무 달라져 있고 그대로인 건 또 너무 그대로라, 이래저래 놀랄 일이 많다. 할 말은 많지만 할 수 없었던 한 맺힌 나의 학창 시절은 이미 막 내린 지 오래지만, 학부모가 된 지금이 바로 학교 안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다. 사랑하는 딸은 물론이고, 대한민국 어린이들의 더 나은 삶과 공교육의 발전을 위해서, 체벌로 얼룩진 내 학창 시절의 한풀이를 위해서도, 내가 학부모인 동안에는 학교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목소리를 내려 한다. 독자분들께도 당부 드린다. 정동칼럼을 읽는 여러분들이 학교 운영에 참여해야 학교가 변화한다. 고된 돌봄과 살림과 돈벌이까지… 틈나면 ..
2011년 3월11일, 최악의 시나리오가 이야기되었다. 반경 250㎞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피신한다. 10년, 20년, 30년 동안 집으로 다시 돌아올 수도 없다. 그 수는 무려 5000만명이다. 갑작스럽게 자기가 살던 터전을 떠나 250㎞ 바깥으로 이동한다고 상상해 보자. 집을 버리고, 마을을 버리고, 직장을 버려야 한다.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잃는 것이다.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전쟁도 가장 큰 비극이지만, 곧 끝나리라는 희망은 있다. 하지만 이 최악의 시나리오는 10~30년 동안 지속된다. 후쿠시마 제1원자력 발전소 사고 때 일본 총리였던 간 나오토는 당시 상황을 무겁게 회고했다. 그는 일본 원자력위원회 위원장 곤도 슌스케가 이 최악의 시나리오를 이야기했었다고 말했다. 만약 한국이라면 어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