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이 기초연금을 두고 윤석열 정부와 맞붙을 조짐이다.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이재명·심상정 후보 모두 기초연금 30만원을 40만원으로 인상하겠다고 약속했고, 정부가 ‘현행 70% 노인 40만원’을 국정과제로 확정하면서 대략 기초연금 윤곽이 잡힌 듯했다. 그런데 지난달 과반 의석을 가진 민주당이 ‘모든 노인’ 대상 기초연금 카드를 꺼내면서 전선이 생긴 것이다. 사실 지난 대선에서도 민주당은 투표 9일 전에 기초연금 40만원 공약을 내놓아 주위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이미 발표한 대선 공약집에 없는 정책이었으나, 상대 후보들이 40만원을 공약집에 명시하자 급박하게 추가한 것으로 추정된다. ‘모든 노인’ 기초연금도 민주당의 연금정책 기조에서 보면 뜻밖의 제안이다. 민주당이 지금까지 말해온 기초연금 대..
이겼다. 헌법재판소 대법정을 나와 피해자를 부둥켜안고 함께 울었다. 이긴 기쁨이었을까? 헌법재판 6년을 버틴 서러움이었을까? 지난달 29일,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가 거대한 국가기구와 싸워 이겼다. 헌법재판소는 박근혜 정부 공정거래위원회가 가습기 살균제 ‘인체 무해’ 표시 광고를 한 SK케미칼과 애경산업을 고발하지 않고 조사 종결한 것이 피해자의 기본권을 침해했다고 선언했다. 한 명의 피해자가 6년을 싸워, 가습기 살균제 생산자 SK와 판매자 애경을 처벌할 수 있는 첫 관문을 열었다. 정부가 인정한 피해 사망자만도 1066명에 이른 가습기 살균제 참사가 다른 비극적 사고들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가족 건강에 좋은 줄로 믿고, 사랑하는 가족의 머리맡에 정성스럽게 가습기 살균제를 넣고 틀어 주었다는 것이다. ..
그는 여전히 교단에 있다. 서울 모 고등학교에서 체육 교사의 탈을 쓰고 있는 성범죄자. 신입 동료 교사에게 “운동을 해서 보기 좋다”며 팔·가슴·허리 부위를 만지고, “성에 관심이 많아 보인다”며 콘돔을 건넨 그가. 학생들에게는 “선생님한테 그렇게 속살 보이면 안 된다” “여자가 함부로 허리 돌리는 것 아니다” “손가락 하나면 너희 아무것도 못하게 할 수 있다”라며 성희롱을 저지른 그가. 아직도 교사다. 그래서 우리는 2018년을 보내지 못한다. 보낼 수가 없다. 서울 양천구 금옥여자고등학교, 2018년 9월13일 스쿨미투 발생. 트위터 해시태그는 #금옥여고_미투. 하루 전날 JTBC 뉴스에 선배 교사가 신입 교사를 1년 이상 성추행했고 피해 교사가 학교에 신고했으나 학교 측과 강서양천교육지원청이 무마했..
오래전 어느 날, 유치원에서 돌아온 아이가 커다란 비밀을 하나 알려주었다. “엄마, 엄마, 그거 알아? 저 커다란 나무 아래 저만큼 큰 나무가 거꾸로 서 있다는 거!” “응?” 땅 밑에는 말이야 저 나무랑 똑같이 닮은 나무가 있대, 나무의 뿌리는 안 보이지만 나무랑 같이 자라고 있대. 그러니까 뿌리는 땅속으로 자라는 큰 나무래. 와, 그렇구나! 땅 위의 나무와 땅속의 나무가 서로 마주보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몰랐던 사실은 아니지만 어린이의 눈을 통해 세상이 새롭게 경이로워지는 순간이었다. 질문은 계속 이어졌다. 근데 땅속은 얼마나 깊어? 하늘만큼 높아? 그래서 저렇게 커다란 나무만큼 땅속 나무도 계속 자랄 수 있는 거야? 그렇겠지. 하지만 거꾸로 말해야 하지 않을까? 뿌리가 자랄 수 있는 깊이만큼만 지상..
농사는 생명을 가꾸는 존귀한 일이다. 농민에 대한 존중이 없으면, 더불어 사는 공동체의 가치가 훼손된다. 농사는 생명을 살리는 땅과 더불어 하는 일이다. 먹지 않고 일할 수는 없다. 농업 노동을 가벼이 여기면, 삶의 뿌리가 말라간다. 농민이 없으면, 생명도 없다. 1930년 10월의 일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은 ‘살인적인 쌀값 하락’으로 난리가 났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쌀값이 최저가격으로 폭락했다. 1930년 10월27일자 조선일보는 당시 상황을 크게 보도했다. 현미 한 섬(160㎏) 가격이 5~6년 전에는 36~37원이었다. 1930년 10월에는 18원50전까지 떨어졌다. 폭락의 원인은 대풍년이었다. 이전까지는 쌀 수확량이 평균 1300만석이었는데, 1930년에는 1929만6000석이나 되었다..
9월 마지막 주, 세계 언론과 정치의 화두는 이탈리아 총선이었다. 유럽의 주요 인물들뿐 아니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도 ‘민주주의가 기로에 섰다’고 우려했다. 지난 25일 이탈리아 총선에서 극우 성향의 이탈리아형제들(FdI)이 압승을 거두고 그 대표인 조르자 멜로니의 총리 취임이 확실시되었기 때문이다. 논란의 핵심은 멜로니와 이탈리아형제들이 그 접두사가 무엇이든 파시스트라는 점이다. 뉴욕타임스의 한 기사는 멜로니를 보도하며 ‘파시스트’나 ‘파시즘’이라는 단어를 28번이나 사용했다고 한다. 실제 멜로니는 무솔리니를 추종하는 네오파시스트 정당인 이탈리아사회운동(MSI)에서 정치를 시작했으며, 이번 총선의 주요 공약들도 종교, 가족, 국가를 강조하고 LGBT와 이민자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그러나 멜로니는..
5대 그룹 중 SK에 뒤이어 LG가 ESG 보고서를 발표했다. 친환경(E), 사회적 책임(S), 투명하고 민주적인 지배구조(G)를 지향하는 ESG 경영이 기업의 필수적 과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애초 기업의 투자유도 전략으로 논의되던 ESG는 새로운 재편 국면을 맞은 세계화 질서 속에서 기후위기, 보편적 인권 의식의 성장, 구조적 불평등의 심화 등 전 지구적 대응이 필요해진 현안들에 대해 기업들도 동참하지 않을 수 없는 가치가 되고 있다. 2021년부터 유럽연합이 자본시장에 관여하는 금융사에 ESG 공시의무를 법제화함으로써 이제 ESG 경영은 기업윤리의 차원을 넘어 법적 의무로 전환되고 있다. 올해 초 이탈리아는 헌법을 개정하여 기업의 환경보전 의무를 명시하였다. 환경보전의 과제를 헌법화한 것은 스페인(..
지난 8월 온 나라는 ‘국민 실질문맹률’ 보도로 난리법석을 떨었다. ‘심심한 사과’라는 말을 ‘심심하다’라는 뜻으로 오해하는 등의 사소한 이유가 발단이 되었고, 급기야 이런 청년들을 ‘실질문맹자’로 몰아세우기도 했다. 어떤 매체는 한 술 더 떠서 한국의 ‘실질문맹률’이 75%에 이른다는 심각한 오보를 냈고, 적지 않은 언론들이 검증이나 자료 확인 없이 그 기사를 그대로 베껴썼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얼마나 우리 언론들이 문해에 대해 낮은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참에 문해에 관한 몇 가지 오해를 풀어 본다. 첫째, 언론에서 거리낌 없이 사용하고 있는 문맹률이라는 표현은 비문해율로 표기하는 것이 맞다. 문맹이라는 표현은 이른바 문자생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을 얕잡아 보는 말이다. 게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