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고 기사는 사람을 두 가지 기준으로 분류한다. 모든 이의 영면이 뉴스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럴 필요도 없다. 부고에는 ‘웬만큼’ 사는, 살았던 집안의 상사(喪事)만 실린다. 또한 그런 가족 중에서도 ‘정상’ 구성원만등장한다. 누군가 사망하면 배우자, 아들, 딸, 사위, 며느리의 전·현직 직장과 직위가 병기된다. 하지만 부모가 사망해도 모든 자녀가 이름을 올리는 것은 아니다. 사랑한 배우자를 잃었어도 나설 수 없는 이들이 있다. 이는 단지 혼외의 삶에 대한 부정을 넘어, 사실상(사실혼) 가족과 동성애자 부부 등 실제로는 가족이지만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제도적·문화적 배제다. 상실은 보편적 경험이지만 애도는 자격을 요구한다. 그 자격은 가족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다했는가에 의해 결정되지 않..
승려들의 분신처럼 종교인의 자살은 순교와 구별하기 어렵다. 탄압받는 정치지도자의 자살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자살은 열사의 저항으로만 간주된다. 자살에 대한 사회적 통념인 나약함은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 의 유명한 대사, 가톨릭 신부인 주인공 상현(송강호)의 기도는 그 경계를 허무는 것처럼 보인다. 이 기도문에는 개인의 우울과 신앙인의 헌신이 혼재되어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살이 썩어가는 나환자처럼 모두가 저를 피하게 하시고 사지가 절단된 환자와 같이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게 하시고 두 뺨을 떼어내어 그 위로 눈물이 흐를 수 없도록 하시고… 손톱과 발톱을 뽑아내어 아주 작은 것도 움켜쥘 수 없고… 머리에 종양이 든 환자처럼 올바른 지력을 갖지 못하게 하시고 영원히 순결에 바쳐진..
나는 업무 차원의 식사나 여러 사람이 모이는 자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학창 시절에도 공부 모임 후 뒤풀이는 공포였다. 당시 가장 큰 이유는 나는 술도 담배도 못하는데, ‘엔(n)분의 일’의 계산법이 억울해서였다. 그리고 정식 모임이 끝난 후에 더 치열해지는 향학열이 이해되지 않았다. 진짜 세미나는 술자리에서 이루어진다. 왜 술 마시며 공부를 할까. 음식은 혼자 편안하게 아니면 친밀한 사람들과 즐겁게 먹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어떤 ‘높은 분’이 내게 “일 이야기가 있으니 점심 한번 합시다”라고 제안해서 나는 정중하게 e메일을 썼다. “… 영광으로 생각하지만 바쁘신 선생님의 시간을 뺏는 것은 원치 않으니….” 내 요지는 “만나지 말고 메일로 말씀하시라”였다. 그런데 무슨 한국말이 그리 어려운지 상대..
셰익스피어는 말없는 사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간명한 정의를 내렸는데, 왠지 환상을 깨는 경고처럼 들린다. “그들은 무식하거나 화젯거리가 없어서 단지 ‘할 말’이 없다.”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는다. 다른 이유로 말이 없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일반적으로 말없는 남성은 과묵함으로, 말없는 여성은 조신함과 교양으로 평가받는 경향이 있다. 우리 문화에서는 말을 잘한다 해도 과묵보다는 호감이 덜한 편이다. 바람직한 문화가 아니다. 토론도 못하고 의사소통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을 양산할 소지가 크다. 특히, 정치인이 말이 없다? 이건 매우 곤란하다. 자질과 관련된 문제다. 정치인은 수시로 의견을 피력해야 한다. 등장 초기부터 안철수 의원에게 지속적으로 제기된 문제는 ‘과묵하다’는 것이다. 정치적 입장 표명이 ..
일본 에도(江戶) 시대, 1690년에 직업의 종류는 530종이었다고 한다. 1920년 일본 국세(國勢) 조사에 신고된 직종은 약 19만종. 그로부터 85년 후인 2005년 글로벌 자본주의 시대에는 얼마나 많은 직업이 생겨났을까? 놀랍게도, 3만종으로 6분의 1 미만으로 줄어들었다. 일본 국립역사민족박물관이 펴낸 에서 이 자료를 읽고 내가 얼마나 진부한 인간인지 깨닫는다. “자본주의가 발달하면 사회가 복잡해지고 인간의 생활양식은 다양해지며…” 이러한 통념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현실은 반대다.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인간의 삶은 획일화된다. 집에서 만든 한 벌 옷의 다양성이 공장에서 대량 생산한 제품과 비교가 되겠는가. ‘우리나라’ 개념은 근대 초기 인쇄술 발달의 결과였다. 출판된 표준어 강요는 이질적인..
서두에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이 글이 현재 논란 중인 특정 사건의 피해자에게 또 다른 인권 침해가 될까봐 매우 조심스럽다. 불명예로 간주되는 사건의 특성은, 사건 자체보다 회자되는데 ‘가해 세력’의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불륜이라고 불리는 사랑을 경험하며, 혼외 관계는 일부일처가 제도화된 사회에서 흔한 인생사다. 정확히 말하면, 불륜이 아니라 불법이다. 혹은 비합법? 사랑에 ‘현행법 위반’이라는 개념이 성립할 수 있을까. 마음이 제도의 틀보다 작아서 그 안에 들어가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인간의 마음, 생각, 감정이 어떻게 구조, 그것도 법제의 틀 속에 구겨 넣어지겠는가. 사랑은 불법과 합법 차원에서 논의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범성애(汎性愛). 사랑의 대상은 삼라만상이..
만일 종북을 ‘종북’으로 쓰지 않아도 될 만큼 이 말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졌다면, 이는 전적으로 국가정보원과 언론의 노고가 아닐 수 없다. 지하철에서 두 청년의 대화가 들린다. “야, 우리 둘이 은행을 털려고 작정했어. 그렇게 마음만 먹어도 죄냐?” “어디 가서 그런 소리 마라. 은행 터는 거랑 내란이랑 같냐?”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에서 ‘내란음모 사태’로 뉴스가 바뀌었다. ‘종북세력 존재론’이 난무했으므로 놀랄 일은 아니다. 여론은 정치권과 국정원 모두 개혁하라는 양비론이 대세다. 유사 이래 국정원이 지금처럼 유능한 적이 없는 것 같다. 통일전선 전술로 치자면, 차르와도 연대하라던 레닌도 칭찬할 만하다. 물론 현재 정황은 그들의 능력에 기인했다기보다는 상대방들이 -실책도 아니고- 워낙 무능,..
남성 권익을 내세운 시민단체 대표가 “1억원 후원”을 외치다 목숨을 잃는 사고가 발생했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단체 운영의 경제적 어려움’이 가장 가시화된 이유다. 시민단체 대표가 대중에게 직접 운영비 문제를 하소연하는 경우는 드문 일이다. 하지만 이번 일이 아주 생소한 사건은 아니다. 나는 사회운동 관련 글을 쓰기 위해 소위 보수 성향의 시민단체 활동가 50여명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들의 주장은 ‘반김(정일)반핵’ ‘성 구매 권리 확보’ ‘한·미동맹 강화’ ‘동성애 금지’ 등 다양했지만,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답게 예의바르고 헌신적이었다. 게다가 상근비 없이 직장생활을 병행하면서, ‘오로지 옳다는 신념에서’ 자기 돈을 내가며 활동하는 경우도 많아서 인간적인 감명을 받기도 했다. 그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