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기와 땀이 범벅된 날들. 구청에서 운영하는 도서관마다 만원이다. 시험 준비생이 아닌 사람은 앉아 있기 미안하다. 여름 두 달을 쉬면 인생이 부도날까. 다들 안쓰럽다. 중·고생을 ‘1318’로 부르던 시기가 있었다. 지금은 서른 살 넘어 취업 때까지, 아니 평생 학습으로 고달픈 시대가 됐다. “ ‘지금’ 공부 안 하면 ‘나중에’ 저렇게 된다.” 10대를 옥죄는 최고의 스트레스일 것이다. 그런데 도서관에는 나를 비롯, ‘저렇게’ 된 사람들 천지다. 신자유주의 시대 증폭된 미래에 대한 불안과 국가의 역할 부재. 대비하지 않는 미래는 ‘노숙인 신세’일 것이라는 불안이 일상을 압도한다. 더욱 높은 수준의 예견이 필요해졌다. 생명보험의 승리는 이를 상징한다. 사실, 지금 고생이 미래에 보상받는다는 확신도 없다. ..
글자 그대로라면 호색한(好色漢)은 색깔을 좋아하는 예술가고 색골(色骨)은 컬러 뼈다귀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색(色)만큼 다양한 의미와 비유가 가능한 글자도 드물다. 성(性), 캐릭터, 입장, 종류, 정치학, 특성, 건강 상태까지 표현 가능한 다채로운 언어다. 적자(赤字), 적나라(赤裸裸), 적빈(赤貧·몹시 가난함), 청신호(靑信號), 홍일점(紅一點), 상록수(常綠樹), 회색인(灰色人)…. 색깔은 색깔을 떠나 사회를 설명한다. 뭐니뭐니 해도 정치색을 따라갈 수 없으리라. 주지하다시피 검은색은 주로 ‘협박(blackmail)’ ‘속이 시꺼먼 놈’ 등 부정적인 의미다. 반대로 흰색은 ‘깨끗함’, ‘숨김 없음(백서·white paper)’을 과시한다. 일제시대 일경은 독립운동가나 사회주의자..
나는 삼남매 집안의 큰딸이다. 우리 셋은 우애는 없는데 자주 만난다. 결국 주로 싸우고 헤어진다. 며칠 전 여동생이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왜 이렇게 화가 많을까….” 남동생은 평소 말하고 싶었던 주제였는지 즉각 반응했다. “그러게 말야! 누나들은 왜 그렇게 맨날 분노가 많아. 나를 봐, 화내는 거 봤어?” 그러자 여동생이 발끈, “야! 너, 말 잘했다. 맞아, 너는 화를 안 내. 근데 남을 화나게 하는데 아주 선수야!” 화내는 사람, 화나게 하는 사람. 누가 더 문제일까. 인간의 감정은 외부 자극이 아니라 개인의 반응이 결정한다. 스트레스가 좋은 예인데 다양한 척도가 있지만(1위 가까운 이의 죽음, 2위 결혼, 3위 이사 등), 고통은 개인의 스트레스 내성(耐性) 능력에 따라 달라진다. 즉 화..
성산업은 워낙 많은 이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서, 경찰은 과중한 단속 업무와 비난에 동시에 시달린다. 성매매가 제대로 적발되지 않는 이유는 수십가지겠지만 흥미로운 사정이 있다. 최근 읽은 책에서 경찰의 하소연에 공감했다. “선진국은 야간에 할 일이 없다. 야간 취객이 적다. 우리처럼 취객에게 시달리지 않으니 다른 일을 할 여유가 생긴다.” 어디서 들어본 듯한 이야기 아닌가. 영화 에서 시위 진압에 경찰 병력이 집중되면서 연쇄 살인 성폭행 용의자를 눈앞에서 놓치는 장면의 기시감. 두 가지 사례는 남성 문제 혹은 남성들 사이의 문제 때문에, 국가 권력(남성)이 남성을 관리하기에 바빠 국민(여성)을 보호하지 못하는 현실을 보여준다. 많은 한국 남성에게 술은 일상의 동반자다. 게다가 음주문화에 지나치게 너그럽..
난 한 달 동안 북한과 미국은 한반도 주변을 무대로 거침없는 전쟁 협박 정치를 했다.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에 따라 한국 사회는 뉴스의 순서를 달리했다. 김정은 체제의 리더십 연습과 미국의 무기 실험에, 왜 한국 사람들이 전쟁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는지 새삼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6일 뉴욕타임스는 한국 사회의 전쟁 불감증을 보도했다. 그들 입장에서는 전쟁에 대한 공포와 위기감이 없어 보이는 한국인의 일상이 이상했나 보다. 하지만 전쟁 불감증은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다. 이는 전쟁에 대비하지 않는다는 안보 불감증과 다르다. 사실 현대전, 특히 한반도처럼 좁은 지형에서는 전쟁의 공포에 떨 필요가 있는지조차 의문이다. 레이더나 자외선으로 목표물을 감지해서 정확히 타격하는 유도(guided) 미사일과 핵이 날..
정희진 | 여성학 강사 이명박 전 대통령은 임기 일주일을 남긴 지난 2월18일, 라디오 연설에서 “5년간 행복하게 일했다”고 마지막 인사를 했다. 사저가 있는 서울 강남구의 신연희 구청장은 “이 대통령은 5년이란 찰나의 순간에 경제대국, 수출대국, 문화대국, 체육대국, 관광대국이란 위업을 달성했다. 최고 반열의 평가를 받을 거라 확신한다”고 말을 보탰다. “행복했다.” 정말 행복했다는 소회인지 의례적인 수사인지 모르겠지만 내겐 생소했다. 솔직히 말하면 놀라움과 두려움을 느꼈다. 집권 초기부터 이 전 대통령은 본인의 이미지와 맞지 않는 의외의 단어를 구사했다. 애초에 국민이 그에게 기대한 것은 민주주의나 부패척결이 아니었다. 그의 당선은 그의 재산형성 과정에서 보여준 ‘능력’을 보고, “우리도 당신처럼 잘..
정희진 | 여성학 강사 설 연휴에 문자로 “새해 복 많이…”라는 인사를 받고 복 받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각종 업체, 정치인, 사회단체가 집단 발송한 이 편지들의 운명은, 삭제. 그리고 이 노동에 동반되는 감정은 불쾌감이다(내 번호를 어떻게 알았지?). 소통되지 못하는 언어는 소음이다. 이런 상황에서 글자는 쓰레기(스팸)로 전락한다. 영화 에 등장하는 만주어는 중국에서도 동북부 오지의 노인 10여명만이 사용한다고 알려져 있다(경향신문 인터넷판 2011년 9월6일자). 어떤 언어는 ‘풍성’하지만 의사 전달에 도움이 안되고 어떤 언어는 극소수가 사용해 사라질 운명이지만 소중하다. 글쓰기가 생계수단이라고 말하기 민망하지만, 위 사례들은 내 직업병과 관련이 있다. 나는 여성이지만 소수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
정희진 | 여성학 강사 몇 년 전 지하철 노약자석에 붙은 ‘인권은 배려입니다’ 글귀가 적힌 국가인권위원회의 공익광고를 본 적이 있다. 나름 문제의식을 느낀 나는 위원회와 인권단체에 이 문구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수정을 요구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배려가 뭐가 나쁘냐.” 모든 인간은 법 앞에, 신 앞에 평등하지만 우리가 매일 경험하듯 현실에서도 그런 것은 아니다. 평등은 지향이고, 현실에서는 사람들이 처한 상황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인권은 배려가 아니라 갈등하고 경합하는 가치다. 그런데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주장은 이 희미한 평등 개념조차 우아하게 배반한다. 누가 누구를 배려해야 한다는 것일까? 돈 없는 사람이 돈 있는 사람을 배려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구조적 가해자(강자)가 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