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서울 도심을 뜨겁게 달군 기후정의행진에는 주최 측 추산으로 3만5000여명이 참가했다. 3년 전보다 5배 많은 사람들이 모여 국내 환경 집회 중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이대로 살 수 없다”며 정부와 기업에 보다 적극적인 기후위기 대응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거셌다.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폭염, 가뭄, 화재, 홍수 등 대형 재해가 많은 시민들을 거리로 불러냈을 것이다. 기후변화에 대한 시민들의 걱정은 커지고 있지만 위기 대응의 핵심인 신재생에너지는 한국에서 궁지에 몰리고 있다. 감사원은 올 하반기 감사 대상에 문재인 정부 신재생에너지 사업을 새로 포함시켰고, 국무조정실은 신재생에너지 지원사업에서 수천억원대 부실을 적발했다는 발표를 했다. 기획재정부는 내년 신재생에너지 지원사업 예산을 올해보다 3..
한 시절 깊게 연대한 누군가의 죽음은 내 삶을 성찰하게 한다. 이때 누군가의 죽음은 소설가 박상륭이 통찰했던 ‘공문(空門)의 안뜰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바깥뜰에 있는 것도 아닌’ 것이 된다. 허대만 전 더불어민주당 경북도당위원장. 포항에서 1995년 전국 최연소 시의원으로 당선됐지만 이후 7번 선거에서 7번 모두 낙선했다. 포항에서 민주당 깃발을 들고 30년 가까이 정치를 한다는 것은 ‘악마의 맷돌’에 인생을 갈아넣는 일이다. 스스로에게 가했던 심적 질타는 얼마나 매서웠을까. 결국 그는 쓰러졌다. 두 번의 시한부 선고에도 여러 해를 넘겼지만 지난 8월22일 생을 내려놓았다. 포항과 정치를 매개로 그와 오랜 인연을 이어왔다. 고향은 그를 권력의 바깥으로 밀어냈지만 그에게 고향은 가능성과 도전의 바다였다. 그..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 의장은 ‘세계의 경제대통령’으로 불린다. 달러가 기축통화인 데다, 연준은 발권력까지 갖고 있으니 영향력이 절대적이어서 나온 말이다. 요즘 이 표현이 별로 과장이 아님을 실감하게 된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이 지난달 26일 세계 중앙은행 책임자들이 모이는 잭슨홀 미팅에서 강력한 긴축(기준금리 인상)을 천명한 뒤 1주일 동안 전 세계적으로 5조달러(약 7000조원) 규모의 주식 가치가 증발했다. 연준발 긴축은 한국에서도 금리 상승으로 이어지면서 여기저기서 대출을 끌어모아 집을 산 청년층에 이자부담을 가중시키고 있다. 이는 몇 가지 사례일 뿐 언제 어떤 식으로 강달러가 소규모 개방경제인 한국경제를 뒤흔들 것인지 예측불허다. 연준이 성장을 희생하고라도 물가부터 잡으려는 건 코..
‘달동네’는 1960~1970년대 가난의 대명사였다. 높은 곳에 동네가 자리잡고 있어 달이 잘 보인다는 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산업화에 따른 대규모 이농으로 도시에 몰려든 주민들이 산비탈이나 고지대에 모여 다닥다닥 붙어살던 곳이었다. 달동네는 싼값에 보금자리를 마련할 수 있는 터전이자 생존 공동체이기도 했다. 정신없이 쓸려들어온 도시생활의 각박함 속에서 지친 심신을 어루만져줄 이웃의 따뜻한 정도 있던 시절이었다. 1980년대 들어 재개발이 본격화되면서 달동네는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고, 아파트 단지가 속속 들어서면서 90년대 후반에는 거의 대부분 사라졌다. 그렇다고 가난한 사람들의 고단한 삶까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2000년대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달동네는 ‘반지하’와 ‘옥탑방’ ‘쪽방’이라는 ..
2005년 1월20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하는 취임식에서 “우리 세계의 평화를 위한 최선의 희망은 전 세계에 자유를 확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부시의 취임사에는 ‘자유’와 관련된 표현이 49번(Freedom 27번, Liberty 15번, Free 7번)이나 등장한다. 자유는 미국 보수진영, 특히 그가 속한 공화당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다. 무엇보다 그가 첫 번째 임기 동안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등에서 벌였던 잇단 전쟁을 자유를 위한 노력으로 정당화하려는 의도가 컸다. 하지만 그 전쟁으로 수십만명이 무고하게 희생됐다. 부시는 인류 보편의 가치인 자유를 미국의 패권을 폭력적으로 관철시키는 수단으로 전락시켰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윤석열 대통령도 자유에 대한 사랑이 깊..
최전선은 적과 가장 가까운 전장이다. 전투에서 최전선이 없으면 전진할 수 없고, 최전선이 버텨야 뒤로 밀리지 않는다. 윤석열 정부 출범 후 최전선이라는 말을 자주 떠올리게 된다. 정치적 의미의 최전선은 과거가 침범 못하게 막고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문재인 정부는 적폐청산이 최전선이었다. 뒤로 밀리진 않았지만 대전환 시기를 헤쳐나가진 못했다. ‘다음’에 대한 기대가 윤석열 정부를 낳았다. 그러나 지금 최전선이 보이지 않는다. 무엇을 위해, 어디에 깃발을 꽂고 싸워야 할지 모르는 것 같다. 콩자루가 터져 여기저기 콩이 난무하는데도 뭐부터 쓸어담아야 할지 허둥대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 국정수행 지지율 20%대가 이를 시사한다. ‘매우 잘못했다’는 의견이 30%대인 조사 결과도 있다. “선거..
2012년 8월31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한·중 수교 20주년 기념 리셉션에 시진핑 당시 부주석이 양제츠 외교부장 등을 대동하고 등장했다. 참석 인사의 급과 규모를 보면 이례적이었고, 시진핑이 차기 지도자로 한·중관계를 중시할 것이란 분석이 나왔다. 오는 24일 한·중 수교 30주년을 맞지만 10년 전과 같은 축제 분위기는커녕 양국 관계가 더 크게 흔들리지 않을지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는 느낌만 받는다.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라는 애매한 표현으로 규정된 양국 관계는 경제에서 괄목할 성과를 이뤄냈지만 안보 문제를 두고는 적잖이 삐거덕거렸다. 관계의 고비는 규범과 가치관 충돌 때문이기도 했지만 깊숙한 갈등은 2016년 사드 한국 배치 사태에서 보듯 미국, 북한과 관련된 이슈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
‘영혼 없는 공무원.’ 이명박 정부 출범 직전인 2008년 1월3일 국정홍보처의 인수위원회 업무보고 때 등장한 이후 대중의 입길에 자주 오르내린 표현이다. 한 인수위원이 전 정부의 언론정책을 비판하자 김창호 당시 국정홍보처장이 “우리는 영혼 없는 공무원들”이라고 말하면서다. ‘위에서 하라면 할 수밖에 없으니 우린 아무 죄가 없다’는 자조(自嘲)나 다름없었다. 다음날 김 처장은 ‘관료는 영혼이 없다’고 한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말을 인용했다며 “관료는 어느 정부에서나 그 정부의 철학에 따라 일할 수밖에 없다는 걸 말한 것”이라고 해명했으나 파장은 가라앉지 않았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이후 나타난 몇몇 장면을 지켜보면서 ‘영혼 없는 공무원’이란 말을 다시 소환했다. 가장 대표적인 게 통일부의 ‘탈북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