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치자마자 아이들이 계단을 급하게 내려온다. 텃밭상자를 분양받아 돌보는 1학년들이다. 가로 2m 세로 1m의 텃밭상자 21개를 세 명당 하나씩 분양해 주었는데 아이들이 쏟는 정성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다. 미술시간에 정성 들여 각자의 텃밭에 푯말을 만들어 꽂아 놓았는데 유머러스하고 기발한 표현이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해도 손색이 없겠다 싶다. 아이들은 상추, 고추, 오이, 토마토 등을 심고, 잡초를 제거하고 매일 물을 주며 들여다본다. 텃밭상자의 작물들을 돌보는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른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들린다. “와! 살았어! 죽을 줄 알았는데!” “선생님! 진짜 싹이 났어요!” “으악! 벌레다!” 아이들의 감탄사가 점심을 먹고 지나가는 선생님들의 발걸음을 텃밭상자로 이끈다..
‘스승의날’이라고 30대가 된 제자들이 연락을 해왔다. 고맙고도 민망한 일이다.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스승이 웬 말이냐고, 이젠 술친구나 하자고 해도 ‘쌤’이란 호칭을 잘 놓지 않는다. 그들은 고마웠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 시절의 미숙함이 먼저 떠오른다. 20대 중반의 풋내기 선생 시절, 망아지 같은 사춘기 아이들을 감당하지 못해 툭하면 울고 화내고 야단쳤다. 마음만 앞서고 몸은 따라주질 않으니 용을 쓰다가 방학식을 마치고 나면 시름시름 앓았다. 아이들의 성장을 돕는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외려 내가 목격한 훌륭한 선생들은 ‘선생’이란 이름을 달고 있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입학할 때부터 모자를 눌러쓴 채 눈을 마주치지 않는 아이가 있었다. 초등학교 때 심한 따돌림을 겪은 후로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는..
도가 경전인 에 기인지우(杞人之憂)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기나라 사람 중에 하늘이 무너지거나 땅이 꺼지면 어쩌나 걱정하느라 식음을 전폐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를 딱하게 여긴 어떤 사람이 사실적인 이치로 깨우쳐주니 그 사람이 크게 기뻐하였다는 내용이다. 교과서나 사전에는 이 단어가 ‘지나치거나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의미로 정의되어 있어서 대개 지나친 걱정이 자신에게 해가 될 수 있음을 잠시 생각해보는 정도로 학습을 하게 된다. 학생들과 이 고사의 의미를 좀 더 다각도로 생각해보고 싶어서 단어의 뜻, 의미에 대한 설명을 모두 없애고 한자와 번역문, 필요한 배경지식, 그리고 질문 하나만으로 학습자료를 만들었다. 자료를 공부한 뒤 ‘이 이야기를 배우며 내가 생각해보게 된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글쓰기를 ..
2018년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에게 ‘강남형 혁신학교’를 제안한 적이 있다. 옆에 있던 보좌진이 다들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혁신학교의 전통을 오염시킬 위험한 발상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 그해 겨울부터 서울 강남3구를 중심으로 혁신학교를 반대하는 학부모들의 시위가 잇달았고, 혁신학교 지정이 연이어 무산되었다. 무엇보다 혁신학교에 대한 괴담성 흑색선전이 광범위하게 퍼져버렸다. 우선 팩트체크를 해보자. 혁신학교가 학력이 낮다는 말은 맞다. 혁신학교의 평균 학력은 일반학교의 평균 학력보다 낮게 나타난다. 소득 수준이 낮은 지역에 혜택을 준다는 취지로 혁신학교를 많이 지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혁신학교로 지정되면 학력이 저하된다는 말은 틀렸다. 학력이 ‘저하’된다고 표현하려면 공시적 데이터..
신규교사들은 아이들을 처음 만날 때 “몇 살이세요?”라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나이를 알게 되면 결혼과 출산 경험을 추정하고 교사의 수준(?)을 파악한다. 어떤 신규교사는 학부모에게 애를 안 낳아봐서 학생을 잘 다루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다. 25년 차 선배 교사도 초임 시절 애를 낳고 키워봐야 참교사가 된다는 말을 들었다며 젊은 교사들이 종종 겪는 일이라고 위로했다. 출산과 양육은 교직의 역량에 필수적인 조건일까? 출산과 양육에 대한 의미 부여는 교사마다 달랐다. 자녀가 있는 교사에게 물었더니 자식이 내 뜻대로 안 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고 그런 까닭에 교실에서 학생의 부족함을 너그럽게 봐줄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힘든 학생을 만나면 자신은 1년만 책임지면 되지만 저 아이 부모는 오죽하겠나 싶어 이해..
올해부터 학교를 다녀온 아이들은 책을 한 권씩 소리 내어 읽어야 나가 놀 수 있기로 하였다. 일찍 학교를 마친 아이들은 점심을 채 먹기 전에 돌아오므로 이때부터 아이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전까지 얼른 부지런을 떨어야 한 권이라도 더 읽을 수 있다. 처음에는 읽기를 어려워하는 아이들 몇을 위해 마련한 일이다. 아이들은 다양한 이유로 읽기를 어려워하는데, 책을 소리 내어 읽는 것보다 더 좋은 처방은 없다고 하여 시작한 일이다. 하지만 누구만 읽어야 한다면 왜 그런지도 설명해야 하고, 또 그렇게 해서는 읽기가 자리나 잡을 수 있을지 염려도 되어 그냥 누구든지 한 권의 책을 소리 내어 읽으면 잠시 나가 놀 수 있기로 한 것이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영 한글을 못 떼어 걱정을 사던 아이가 처음에는 떠듬떠듬 읽기를 시..
다음과 같은 가정들을 믿고 있었다. 인류 문명은 계속 발전하고 있고, 과학기술은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인류에게 닥친 문제들을 해결할 방법을 찾아낼 것이라고. 하지만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발전의 시계는 멈추었고 삶의 질은 후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숨쉬기 곤란할 만큼 심각한 황사와 미세먼지, 기후위기와 플라스틱의 공포는 점점 목을 죄어 오는 것 같다. 핵무기와 원자력발전의 위험은 또 어떠한가? 과학기술의 발전이 편리함과 풍요를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인류는 이로 인해 유례없는 위기와 도전에 직면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러한 현실 앞에 마주 서게 된 데에는 전체적이고 통합적으로 사고하지 않고 전문성을 금과옥조처럼 받들며 과학기술의 빛과 그림자를 함께 보지 못하고 맹신하는 우리들 마음의 습관에 원..
모든 생명은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간다. 그중엔 더 절대적으로 남에게 제 목숨을 의지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생명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어린이가 그렇다. 온전히 어른에게 제 삶을 맡기고 있다는 점에서 어른에겐 그들을 안전하게 돌보아야 할 절대적 의무가 있다. 비극적인 아동학대 기사가 연일 이어지는 가운데 의료진이나 교육, 아동복지 종사자를 대상으로 하는 아동학대 신고의무제가 확대되었다. 그러나 학대가 의심되는 아동을 만나도 교사들은 신고가 쉽지 않다고 말한다. 가장 큰 이유는 아이가 원치 않아서다. ‘자신 때문에 부모가 경찰에 잡혀갈까봐’ 두려운 아이들은 둘러대며 학대를 부인한다. 신체에 흔적이 없는 경우 정황만으로 신고를 결심하긴 더욱 쉽지 않다. 지난 3월부터 시행된 즉각보호분리제도 허술하다. 학대가 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