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과 학교, 학원을 뺑뺑이 돌면서 교과서와 참고서만 들여다보는 아이가 인간적인 성숙의 기회를 갖기란 쉽지 않다. 창의적인 인재가 될 가능성은 더욱 희박할 것이다. 시험공부만 한 아이가 자라서 작가가 되기는 힘들다. 삶과 분리된 교육으로는 학습에 흥미를 느끼기도 쉽지 않다. 입시교육의 한계를 자각한 공교육이 학교 담장을 낮추고 지역사회와 소통하고자 애쓰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경험교육이 강조되면서 초등학생들의 현장학습이 늘어나고, 중학교 자유학기제가 시행되면서 체험학습 전문업체가 우후죽순 생겨났다. 하지만 한두 시간 흙을 만져본다고 도자기 빚는 일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도공은 그릇을 빚기 전에 흙 속의 공기를 빼고 조직을 치밀하게 만들기 위해 흙을 치대는 작업을 하고 또 한다. 그 과..
살다 보면 벼락같은 깨달음의 순간을 만나게 된다. 10년쯤 전 서울시교육청 정책보좌관으로 일하던 시절, 한 교사를 만나 논의할 일이 있었다. 그런데 논의를 마친 후 그가 쭈뼛쭈뼛 머뭇거리며 뭔가 다른 얘기를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몇 학년, 무슨 과목을 담당하게 될지를 신학년 시작하기 겨우 일주일 전에야 알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벼락에 맞은 느낌이었다. 20년쯤 전 입시학원 강사로 일하던 시절, 나는 개강하기 두세 달 전부터 준비했다. 그런데 학교 교사들에게는 준비할 시간을 겨우 일주일밖에 안 준다니?… 아, 한국의 교사에게는 ‘교권’이 없구나. 나의 문제제기에 대한 교육청 내의 반응은 냉담했다. 3월1일자로 인사이동이 이뤄지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고, 여지껏 별 탈이 없었는데 뭐가 문제냐는 ..
산업화 시대는 단시간에 대량생산을 해야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속도와 양이 성공의 열쇠였다. 교육도 그랬다. 1990년대 80만명에 이른 응시인원이 올해 50만명으로 줄었다. 그러나 수능 문항 출제방식은 여전히 대량생산과 속도만 중시하던 산업화 시대를 못 벗어났다. 다섯 개 항목 중 하나를 고르는 방식으론 창의력과 비판력을 기를 수 없다. 수업도 정답 고르기만 가르친다. 수능에 응시하지 않는 수업 시간은 의미가 없어진 지 오래다. 이런 교육에 희망이 있는가. 생명과학Ⅱ 20번 문항에 유전 분야 세계적 석학도 놀라움을 표했다. 수능은 우리 학생들에게 이런 문제를 풀라고 요구한다. 대견스럽게도 학생들이 결함을 발견해 이의를 제기하자 평가원은 “문항 조건이 완전하지 않더라도 교육과정 학업 성취 기준을 ..
텔레비전 장수 프로그램이었던 은 밥벌이의 고단함과 소중함, 노동하는 삶의 가치를 얼핏이나마 엿볼 수 있게 해주었다. 연예인이 하루 동안 육체노동을 통해 경험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겠지만, 그래도 한두 시간 맛보기에 그치지 않고 종일 땀 흘리며 노동을 한다는 점에서 ‘체험’이라 이름 붙이기에 부끄럽지 않은 프로그램이었다. 아이들의 체험학습은 대개 한두 시간 ‘해보는’ 데 그친다. 짧은 시간에 많은 학생들이 해볼 수 있게 다양한 편법을 써서 그야말로 ‘맛보기식’ 활동을 한다. 수확철에 감자를 한두 시간 캐보는 걸로 농사체험을 했다고 말하는 것은 농부의 일을 우습게 만드는 것이다. 모든 가치 있는 일은 한두 시간 체험한다고 그 가치를 경험할 수 없다. 를 요약본으로 읽고서 가치를 알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기술의 발전이 빨라지고 다양한 정보가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활용할 줄 모르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특히 코로나 위기로 인해 디지털 전환이 가속화되며 디지털 기술을 쓸 줄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차이가 뚜렷하게 벌어지고 있다.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지 못한 대가는 현상유지가 아니라 상대적인 삶의 질 후퇴로 나타난다. 일례로 예전엔 명절이 다가오면 기차표를 구하기 위해 역에 줄을 서서 기다리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집에 앉아 몇 번의 손가락 움직임만으로 스마트폰 등을 이용해 손쉽게 기차표를 예매한다. 하지만 이런 디지털 서비스의 이용이 어려운 계층은 남들보다 몇 배의 시간과 노동력을 더 들여야만 같은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 격차는 생활 서비스뿐 아니라 먹거리 분야로까지 이..
202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이 끝났다. 팬데믹 상황에서 치러진 두 번째 코로나19 수능이었다. 수능 출제 위원장은 모의평가 결과 수험생 사이의 학력 격차 특징이 발견되지 않아 예년과 비슷한 수준으로 문제를 냈다고 밝혔다. 그러나 수험생과 입시전문가 사이에선 어려운 수능이었다는 말이 돌았다. 다시 질문한다. 수능은 공정한가? 공교육은 또한 공정하였는가? 공교육이 공정하였다는 가정하에서만 수능의 공정성을 얘기할 수 있다. 교실은 학생들에게 교육 환경의 동일성을 제공한다. 그러나 교실 환경도 수도권과 비수도권이 다르고, 특목고와 일반고가 다르다. 온라인 수업이 주류였던 팬데믹 기간의 수업환경은 학생 개개인이 처한 가정환경까지를 고려하니 교육의 공정성에 더욱 강한 의문이 생긴다. 인터넷 속도와 품질, ..
교육부가 얼마나 규제적, 경직적, 예산 낭비적인지는 국민들이 다 안다. 우리 교육이 ‘큰일 났다’는 데에 국민이 공감한다. 교육부 얘기를 하면 사람들은 저마다 고개를 돌린다. 그런데도 교육부는 멀쩡하다. 왜인가? 괴물이라 그렇다. 교육부는 희랍신화에 나오는 머리가 9개인 물뱀 괴물 ‘히드라’에 비견된다. 이 괴물의 머리 하나를 자르면 머리 2개가 새로 난다. 교육부의 최악의 문제는 조직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그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쓸데없는 간섭과 규제를 한다. 결국 교육부는 자유교육의 천적이 된다. 쓸데없는 사업을 벌인다. 교사·교수는 교육부의 행정적 지시를 이행하느라 교육 준비를 할 시간이 없다. 국립대학에는 엄청난 숫자의 교육부 직원이 파견 나와 있다. 잉여인력이다. 난 교수였지만 그들이 뭐하는지..
우리는 스스로 경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대개는 착각이다. 실제로는 경쟁을 ‘당하고’ 있기 십상이다. 어려서부터 경쟁을 해야 경쟁력이 길러진다는 생각 또한 착각이다. 경쟁 시스템은 경쟁력을 길러주기보다 사람들을 통제하는 데 적합한 제도다. 선착순 달리기를 하면서 입에서 단내 나게 연병장을 뛰어본 이들은 알 것이다. 전우애를 기르는 데도, 체력을 기르는 데도 선착순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저 명령에 복종하는 군인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될 뿐이다. 복종심이 군인의 덕목일 수는 있어도 시민의 덕목일 수는 없다. 시민을 기르는 교육을 한다는 학교가 실제로는 선착순 달리기 경주장이 되었다. 시험성적이라는 하나의 기준으로 줄 세우는 교육 속에 경쟁과 통제의 원리가 내재해 있다. 1등급부터 9등급까지 등급을 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