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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딸은 독감에 걸려 일어나지 못했다. 마침 그날이 토요일이어서 나는 “그래, 그럼 아침 먹지 말고 누워 있어라”고만 말하고, 밀린 집안일을 했다. 그런데 딸이 갑자기 부스스 일어나 현관문을 열더니 쇼핑백을 하나 갖고 들어온다. 쇼핑백 안에는 남자친구가 직접 만든 미음이 든 보온병, 양념간장통, 보리물이 든 물통이 들어 있었다.

“어머, 미음을 어떻게 만들었어?” 나의 물음에 딸은 “자기가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서 요리법 보고 처음으로 해본 거래요”라고 대답한다. 아마도 딸은 아침도 못 먹고 침대에 누워서 남자친구에게 문자메시지로 “아파서 아무것도 못 먹고 누워만 있다”라고 말했나보다. 어쨌든 나는 토요일 아침에 딸의 남자친구가 한 애정어린 돌봄노동에 입각한 가사노동(미음 제조 등)에 감동받아 하루 종일 마음이 훈훈했다.

우리 사회는 성평등의 가치를 일상에 실현시키기 위해 “남성들의 가사노동과 육아의 참여”를 요구해왔다. 특정 사회가 얼마나 성평등한지를 측정하는 매우 의미 있는 지표는 ‘남성과 여성의 가사·돌봄 노동에 투여하는 시간 양 비교’이다. 성별분업 이데올로기, 즉 남성의 일차적인 역할은 생계부양이고 여성의 일차적인 역할은 아내·어머니로서의 가사전담이라는 이념체계는 성차별을 유지·재생산하는 데 있어서 핵심적이다.

 

(경향DB)

5인 이상 사업체에 근무하는 상용직 여성들의 임금이 남성 평균의 60%를 조금 넘는 수준인 현실, 여성인권을 유린하는 3대 폭력인 성폭력·가정폭력·성매매 역시 사회적·경제적 약자로서의 여성이라는 성별권력 관계에서 비롯되고 있다. 따라서 성평등 실현을 위해 여성에게는 가정을 나가서 경제활동에, 남성에게는 일터를 떠나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에 참여하는 게 독려돼왔다. 최근 10년간 ‘남녀 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 제19조에 근거한 육아휴직을 남성노동자가 사용할 수 있도록 지원해왔던 이유 중 하나도 ‘돌봄노동에의 남성 참여’라는 가치를 일상 속에 실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육아휴직을 비롯해 남성들의 가족 내 노동 참여가 중요한 사회적 가치, 이슈가 되었다는 것을 반영하듯 새로운 남성들(소위 ‘New Men’)이 등장하고 있다. 집안일도 열심히 하고 아이를 정성스럽게 돌보는 남성들. 그들을 그토록 기다려왔기에 그 얼마나 반갑던가. 그런데 좀 눈여겨봐야 할, 우려스러운 지점들이 보인다.

1997년 IMF 경제위기를 지나면서 소위 ‘평생직장’의 신화가 깨지고 청년실업, 고용의 불안정이 체질화되면서 남성들이 현모양처가 아니라 경제활동을 하는 여성들을 원하는 것은 성평등의 흐름에 부합하는 것이 아닐 수 있다. 남성들이 경제적으로 능력 있는 여성을 원하는 것이 가부장제를 앞서가는 자본주의의 진화에 의한 합리적 생존전략일 수 있는 것처럼, 남성들이 돌봄노동에 참여하는 것도 불안한 사회, 무한경쟁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가족 내 전략인 듯하다.

출근 전 어린 자녀들을 깨워 밥을 먹여 어린이집과 유치원에 보내는 것을 도맡아 하고 업무시간 틈틈이 자녀들이 있는 시설, 학교의 담당자와 연락해 자녀의 상태를 점검하며 퇴근시간 “땡” 치면 주변의 동료들을 본 척 만 척하며 집으로 달려간다. 흔히 ‘가정적인 남성’들이 위험해 보이는 것이 이 지점이다. 직장 내 회식과 행사 참여, 동료들의 경조사를 챙기는 것에는 무성의하기 짝이 없고 오로지 ‘자기 가족’만 보살피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이들은 남성 페미니스트도 아니고 열린 공동체를 지향하는 성평등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도 아니다. 소위 이러한 부류의 ‘가정적인 남성’은 오로지 ‘내 가족’ ‘내 새끼’ ‘내 마누라’의 출세를 위해 살아가는 소위 ‘찌질남’일 뿐이다.

돌봄노동에 남성이 참여한다는 의미는 가족 이기주의에 근거한 개별적 행위가 아니라 열린 민주적인 공동체를 지향하며 생명의 가치를 실현한다는 정치적인 결단, 실천이기 때문이다. 남성들이 여성 배우자관이 변하고 돌봄노동에 참여하는 현상은 박수 쳐줄 일이기는 하지만 차별, 폭력, 억압이 없는 사회를 지향하는 인생관의 변화를 동반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변화는 특정 시기에 보수주의로 회귀할 우려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딸이 아플 때 보여준 남자친구의 행위에 다시 한번 박수를 쳐주고 싶다. “네 남자친구가 동급 친구들과도 잘 지내고 인기 많다고 했지? 그럼 100점 만점에 100점이야. 우리의 딸아~.”

조주은 | 국회 입법조사관·‘기획된 가족’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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