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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재판 중이었던 친족성폭력 피해자의 어머니로부터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고 착잡한 마음 그지없었다. 사연인즉 이렇다. 어느 날 그녀는 자신의 딸이 아버지로부터 지속적인 성폭력 피해를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가정폭력의 피해자이기도 했던 그녀는 피해자 국선변호사의 조언으로 이혼재판을 시작하며 가해자에 대한 고소도 진행했다. 지난달 처음 만났을 때 씩씩한 기운이 느껴지는 그녀는 친족성폭력 사건의 개요를 정리해 내게 건넸다.

그녀는 친족성폭력 피해자 지원사업을 시행하고 있는 모든 기관의 문제점을 꼼꼼하게 짚었고, 일부 ‘피해자 국선변호사’(법률조력인)의 전문성 부족과 비윤리적 태도 등에 대해 토로했다. 피해아동의 진술이 일관되지 않다는 등의 이유로 1심, 2심 모두에서 무죄가 선고돼 마지막 대법원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던 그녀. 그녀가 우려를 표했던 지점은 판사들의 친족성폭력 사건을 바라보는 왜곡된 시선이었다.

“판사가 저한테 ‘아이의 3년 전 키가 얼마였는지?’를 묻는 거예요. ‘모른다’고 대답하니까, 판사의 답변이 ‘엄마가 딸한테 무관심한 거 아니냐’고 했어요.” 결국 우려는 현실이 되어 대법원에서도 가해자에 대해 무죄가 선고됐다.

 

(경향DB)

여성인권과 관련된 3대 폭력은 성폭력, 가정폭력, 성매매라고 할 수 있다. 성폭력, 가정폭력과 성매매의 피해자가 된 여성들은 피해자성을 끊임없이 의심받는다. “여성도 뭔가 맞을 짓을 했겠지” “자기가 선택해서 한 행동인데 왜 피해자죠?” “그 여성이 유혹하거나 즐기지 않았을까?”라는 언설들로 인해 여성들은 피해자성을 인정받기 힘들다.

더군다나 가족 안에서 발생한 범죄인 친족성폭력, 가정폭력의 피해자들은 가족유지 관련 규범으로 인해 ‘신고=가족해체’라는 현실과 부딪히게 된다.이 때문에 범죄의 피해자들은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불안한 삶을 살아간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법률과 제도는 가족 안에서 발생한 친족성폭력과 가정폭력, 성매매를 사회적 범죄로 바라보는 데 의심하는 시선을 내재하고 있다. 가령 ‘범죄피해자보호법’에 근거한 구조금도 피해자와 가해자가 친족관계가 있는 경우에는 원칙적으로 구조금을 지급하지 않도록 규정하고 있다.

성평등 수준이 높은 해외 선진국에서 여성 관련 폭력에서 가장 중요한 정책적 관심과 목표는 피해자의 안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여성인권을 위협하는 폭력들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분리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가해자를 대상으로 한 제대로 된 처벌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한 가족 안에서 남성이 경제를 책임지고 있고 폭력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한 경제적 지원이 부족할 때, 여성들이 폭력을 행사하는 남성에 대한 신고, 고소를 하는 것은 어려워질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그럼에도 어렵게 용기를 낸 여성들에게 법정에서의 “너 아빠랑 사귄 거지?” “너, 아빠를 유혹하지 않았니?” “당신이 이혼하기 위해서 자식을 이용하는 거죠?”라는 폭언들은 그녀들을 두 번 죽이는 행위가 되고 있다.

가족은 사랑의 공동체일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성별 권력관계에 기반을 둔 긴장이 내재돼 있기 때문에 누군가는 가족을 벗어나야 평화와 사랑이 찾아올 수 있다. 앞으로 여성인권이 제대로 보장받기 위해서는 가족 안에서 발생한 폭력이 심각한 사회적 범죄로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피해자는 적절한 보호·지원을 충분히 받고 가해자는 제대로 된 처벌을 받는 것. 그것이 가능하기 위한 관련 법률과 제도의 변화가 뒷받침돼야 함은 물론이다.

조주은 | 국회 입법조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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