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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오랜 친구인 영으로부터 주말에 뜬금없이 낮술 먹자는 마지막 전화가 끊긴 지 15년이 넘었다. 영은 대학교를 졸업한 후부터 소위 ‘맞선’을 보기 시작했다. 20대 후반의 어느 주말 오후 영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주은아, 오늘 선보러 나갔는데 몇 년 전에 나왔던 남성이 또 나온 거야. 너무 깜짝 놀랐는데 더욱 황당한 건 그 남자는 나를 못 알아보더라.” 마지막 전화는 30대 초반 일요일 오후에 이루어졌다. “이제 내 인생에 선은 마지막인 것 같다. 나도 이상하지만 … 진짜 낮술 한잔 마셔야지, 안되겠다.” 영은 신통하다는 점술인으로부터 “41살에 결혼운은 끝난다”는 말을 들은 즈음 결혼을 포기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9월3일 발간한 ‘혼인동향 분석과 정책과제’에는 “저출산 현상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초혼연령 및 미혼율의 상승 등 혼인력의 약화”라는 점을 발표했다. 합계출산율은 가임기 여성(15~49세) 1인이 평생 동안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수를 나타낸 지표로서 출산력 수준을 나타내는 대표적 지표이다. 합계출산율이 1.3명 이하인 경우 초저출산 사회로 분류되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2000년대에 초저출산 사회로 진입했다. 우리나라는 2005년 ‘저출산·고령사회기본법’을 제정하고, 2006년에 ‘제1차 저출산·고령사회기본계획(2006~2010)’을 수립했고, 2013년 현재 제2차 기본계획이 시행 중이다. 많은 예산을 쏟아부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책의 효과는 미미한 수준이고 저출산 현상은 장기화될 우려가 높은 것으로 예측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발표에서도 드러났듯이, 합계출산율이 낮은 이유 중 주요한 하나는 혼인하지 않는 집단이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위기에 따른 높은 청년 실업률은 ‘프로젝트로서의 연애’에 접근조차 못하는 청년들의 비율을 높이고 있다. 청년 10명 중 1명은 실업자이고 실망실업자까지 포함한다면 사실상의 취업애로 청년층은 늘어나고 있다. 1990년대 중후반 이후 세계화에 따라 글로벌 소비대중문화는 일상 속에 침투했고 소비문화의 창궐은 선물과 만남 등의 로맨스를 상품화시킨다. 결국 돈 없으면 연애도 못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어찌 보면 출산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청년들의 연애증진사업이 우선이다.

빈곤 때문에 혼인하지 못한 일부 한국 남성들은 동남아시아 국가의 여성을 찾아 결혼하고 있다. 결국 미(비)혼 여성들만 남고 있다. 여성들은 결혼제도 자체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왜일까? 여성들의 학력수준은 눈부신 속도로 높아져 왔다. 고등교육을 통해 점점 의식수준은 높아지고 인식의 지평은 넓어져왔다. 통계로 나타난 객관적인 지표들만 보더라도 높은 부부폭력 발생률(2010년 기준 53.8%), 불공평한 가사노동 분담률(맞벌이 남편의 가사노동시간은 42분으로 외벌이 남편보다 오히려 2분 적음)과 시집중심의 가족구조 등은 ‘깨인 여성들’로 하여금 다소 무거운 결혼제도 안으로 들어오기를 꺼리게 만드는 원인들이 되고 있다.

정부가 국가재생산의 위기로서의 저출산이 ‘재앙’으로 인식되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부터라도 원인에 대한 제대로 된 진단부터 선행돼야 하지 않을까? 청년들의 연애가 가능할 수 있도록 청년들의 지갑을 채워줄 수 있는 획기적인 고용촉진과 차별해소정책. 결혼생활이 행복해서 기혼여성들이 폭력과 불공평함으로 생겨난 얼굴의 다크서클이 지워지면, 미(비)혼 여성들이 결혼제도로 들어오게 되면 합계출산율은 자연스럽게 높아질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그러나저러나 내 오랜 친구인 영, 합계출산율 저하에 기여하고 있는 그녀는 엄밀히 말하면 미혼인 결혼단념자이다. 영이 원하는 남성의 전제는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배운 여성의 복잡하고 모순된 욕망은 어쩌면 현실 속에 없는 남성을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영아, 지금에서야 말인데. 너 눈 너무 높았다.” 이미 지난 일이고 대답 없는 메아리겠지만 외로워하는 친구를 위해 나도 한번 속에 있는 말을 해본다.


조주은 | 국회 입법조사관·‘기획된 가족’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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