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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서울시는 12월10일 세계 인권의날에 맞춰 발표하려던 ‘시민인권헌장’을 폐기하기로 결정했다. 4개월간의 공든 탑을 무너뜨린 것이다. 인권헌장 제정을 위한 시민위원회는 헌장에 담길 50개 조항 가운데 이견 없이 합의된 45개 조항은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성소수자 차별금지 조항’ 등 미합의 조항에 대해서는 표결에 부쳐 ‘성별·종교·나이 등 차별금지 사유와 함께 성적지향을 이유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적시한 안으로 통과시켰고 서울시의 정치적 판단으로 헌장은 폐기되었다. 법적 강제력이 없는 헌장임에도 인권의 증진을 위한 의미 있는 발걸음에 잔뜩 기대를 품었던 이들 머리에 된서리가 내렸다. 반인권의 숙주였던 동성애 혐오세력에 사회적으로 시민권만 부여한 어처구니없는 역설이 벌어진 것이다.

서울시는 지난해 ‘인권보호 및 증진활동 지원사업’에 대해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지자체로서는 이례적이었다. 그런데 정작 추진약정서까지 체결했던 ‘남산 인권 숲 콘서트’에 대해 ‘정치적 활동’이란 정치적 판단으로 지원을 중단해버렸다. ‘남산 국가안전기획부 터를 인권과 평화, 민주주의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조성하자’는 취지로 마련된 행사였다. 그러나 서울시는 “국가정보원은 중앙정보부와 안기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국가폭력을 자행한 집단입니다”라는 홍보 문구 한 줄을 문제 삼았다. 결국 서울시가 빠진 채 행사를 치러야 했다.

서울 노원구는 내년 생활임금액을 월 149만5000원, 시급 7150원으로 결정했다. 내년 최저임금 116만6220원, 시급 5580원보다 28.2% 높은 수준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권고치인 노동자 평균임금의 50%를 적용하고 서울시 물가가 다른 지역보다 높은 점을 반영해 8%를 더했다. 노원구의 올해 생활임금 적용 대상자는 100여명, 내년에는 150명으로 늘어난다고 한다. 서울시가 광역자치단체로는 처음으로 내년부터 생활임금을 도입하겠다고 밝히고, 법정최저임금보다 많은 6582원을 생활임금으로 정했다. 박원순 시정 1기에 비정규직 6000명을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한 데 이어 2기에는 생활임금 도입에도 앞장선다는 소식에 노동자들의 관심이 대단히 높았다. 그런데 노원구보다 월평균 20만원이나 적은 서울시의 생활임금 적용대상은 120명 수준. 서울시와 투자출연기관에 직접 고용된 직원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서울시 생활임금은 1만3000명이 넘는 민간위탁 간접고용 노동자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지난해 서울시는 30억원을 들여 맥킨지앤컴퍼니-삼일회계법인 컨소시엄에 시정 주요 분야 컨설팅을 맡겼다. 맥킨지보고서는 서울도시철도공사의 업무 효율화를 위해 역무분야 직원 2000명을 아웃소싱해 비정규직화하는 방안을 내놨다. 4월16일 세월호 참사가 터지고 안전업무에 대한 비정규직 문제가 전면화되면서 맥킨지보고서의 봉인이 아직 해제되지는 않고 있다. 박원순 시정 방향이 노동과 인권에서 재벌과 권력으로 가까워지고 있다는 비판이 들끓는다. 정치인의 가치와 신념은 표 앞에서 맥없이 무너지는 경우가 많다. 정치는 설득과 조율을 바탕으로 하지만 가치 실현의 방향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조율은 권력과의 짬짜미이며 시장통 흥정에 불과하다. 노동과 인권은 인류의 가장 보편적인 가치임에도 한국에서만은 유독 ‘표 떨어지는’ 이야기다. 그 이유는 가치를 표로 치환해 사고하며 연명한 대한민국 진보와 민주를 참칭한 세력들의 늙은 주판알 정치 때문이다. 임계점 앞에서 우회를 반복하면 불가능과 체념이 가속도만 낼 뿐이다. 서울시민인권헌장을 둘러싼 박원순 시장과 서울시의 정치적 판단은 ‘박원순 정치’의 노동과 인권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당신 곁에 누가 있냐던 선거 당시 물음에 박원순 시장이 직접 답해야 한다.


이창근 | 쌍용차 해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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